사토 슈호의 <헬로우 블랙잭>
의사라는 직업은 만화 주인공의 숙명인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극적인 능력의 소유자인 의사는 검객과 총잡이와 같은 살인청부업자의 정반대편에서 숱한 명작의 주인공들이 되어왔다. 전설의 명의(名醫) ‘블랙잭’의 이름을 단 사토 슈호의 <헬로우 블랙잭>(서울문화사 펴냄) 역시 그 반열에 끼기 위해 지금 맹렬히 달려가고 있다. 일본 시장에서 근래 보기 드문 인기를 불러일으키고 있고, 국내에서도 점차 독자를 넓혀가고 있는 이 작품은 과연 새로운 의사만화의 전형이 될 수 있을까?
의사만화에는 보통 두 가지 경향이 존재한다. 하나는 <블랙잭> <닥터K>와 같은 천재 외과의가 초인적인 능력으로 무수한 사건들을 해결하는 프로페셔널 만화이고, 다른 하나는 <닥터 고토 진료소>와 같은 변두리의 따뜻한 의사생활을 그린 휴머니즘 만화다. <헬로우 블랙잭>은 그 두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대 의학계의 문제를 정면으로 파고드는 진짜 의사만화다.
숙명의 결투 상대들
주인공인 사이토는 대학병원의 인턴으로, 현재 여러 과를 돌아다니며 연수를 받고 있다. 마담뚜들이 이야기하는 의사의 환상과는 달리 월급 40만원 남짓에 하루 2∼3시간밖에 자지 못하는 힘든 나날을 보내야 한다. 그래도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는 열의와 자부심이 있기에 젊은 날의 고통은 두렵지 않지만, 그를 가로막는 거대한 적들은 결코 그를 만만히 봐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적은 누구인가? 병원균과 불의의 사고, 싸워도 이길 수 없는 불치병? 아니다. 그보다 더 단단한 것이 있다. 병원이라는 막강한 권력의 ‘숨겨진 국가’와 그 속에서 쓰러진 의사들의 패배감이 바로 그가 싸워갈 숙명의 상대들이다.
현재 4권에 이르기까지 수련의 사이토는 야간 당직 응급실, 제1외과, 순환기내과, 신생아 집중 치료실을 거치면서 의사로서 만나야 할 수많은 문제들과 부딪히게 된다. 교통사고 환자만을 전문으로 받아 돈을 긁어모으면서 아르바이트 인턴에게 단독 진료를 맡기는 병원, 간단한 절개 뒤에 남은 수술은 모두 아랫사람에게 맡기면서 거액의 뒷돈을 받는 교수, 콧대 높은 의사들 때문에 수술 날짜를 잡지 못해 죽어가는 환자, 다운증후군이 분명한 미숙아의 수술을 거부하며 아기가 죽게 놔두라는 부모…. 그리고 무엇보다 외과 의국, 내과 의국과 같은 족벌 공동체로 뿌리 깊게 썩어 있는 의사 사회가 이 열정의 청년의사를 고뇌에 처하게 한다.
의사의 본질, 그 무거운 짐
사실 조금만 뒤에 서서 보면, 사이토라는 풋내기가 만들어내는 문제가 당혹스럽게도 보인다. 다른 의사들이라고 해서 그런 고민에 처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장애자가 겪게 될 사회의 편견과 그로 인한 고통을 뻔히 알면서 ‘친권 상실’까지 운운하며 아기를 살리라고 강제하는 것도 과도한 간섭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사이토는 우리 모두가 반성의 축으로 삼아야 할 의사의 본질을 일깨워준다. ‘의사는 생명을 살려야 한다.’
이 만화 속의 많은 의사들은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있고, 각자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제1외과의 시라토리는 의대 사회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 변화도 ‘일단 권력을 잡고 난 뒤’라고 생각한다. 세이도 원장은 돈벌이를 위해 교통사고로 실려온 환자들을 떼로 받아들이지만 그래도 ‘의사는 살려내잖아, 그냥 놔두면 죽어’라고 말한다. 오래된 동네 병원의 미치바 노인은 약을 주고 수술을 하는 것보다는 환자와 대화하며 평생을 보낸다. 문제는 항상 존재하고,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에게 그 문제는 더욱 극적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그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히고, 누군가는 멀리 돌아가고, 누군가는 성급한 결론으로 도덕을 봉해버린다.
이러한 문제를 둘러싼 풍부한 묘사는 지금까지의 어떤 의사만화보다 풍성한 감응을 만들어낸다. <헬로우 블랙잭>은 <철완 소녀>나 <배가본드>와 같은 새로운 궤도의 입체형 만화와 비교해보아도 그 화력에 손색이 없다. 용접하는 듯이 표현한 수술의 추상적 묘사에서부터, 심실 세동과 같은 전문적인 상황의 세부묘사까지 착실한 조사와 풍부한 상상력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쿠니미츠의 정치>에 나오는 입체형의 개그 묘사와 비교해도 좋을 정도의 개성어린 과장법의 터치도 재미있다. 주사를 넣을 때 ‘쭈욱’하는 표정을 짓고, 방심한 마음에서 윗입술을 코에 붙이는 주인공 사이토의 귀여운 표정 묘사가 이 당돌한 청년에게 깊은 마음을 주게 한다.
이명석/ 사탕발림 운영 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