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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 완전정복 3탄 - 걸작들의 탄생비화 [2]
문석 2003-08-08

VOL5 | <악마의 씨>

떡대 좋은 로즈마리라구?

Rosemary’s Baby/ 1968년/ 감독 로만 폴란스키/ 출연 미아 패로, 존 카사베츠/ 출시사 파라마운트

<악마의 씨>가 B급 호러물이 될 뻔했다고? 이 DVD 메이킹 다큐가 밝히는 뒷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애초 아이라 레빈의 원작소설의 판권을 구입한 사람은 B급 호러영화의 ‘거장’ 윌리엄 캐슬이었다. 그는 진동의자를 설치하거나 관객 안에 ‘프락치’를 심어 엄청난 비명을 지르거나 객석을 뛰쳐나가게 해 공포효과를 배가시킨 조금 뻔뻔한 인물이었다. 파라마운트는 그를 믿을 수 없었다. 스튜디오는 캐슬에게 프로듀서를 시키는 대신 로만 폴란스키를 점찍고 접촉했다. 하지만 폴란스키의 첫 대답은 ‘노’였다. 스키광인 그는 <다운힐 레이서>라는 스키영화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스튜디오의 설득에 시나리오 초고를 받아본 다음날 바로 마음을 바꿔먹었지만, 하마터면 폴란스키는 스포츠영화로 진로를 바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폴란스키는 할리우드 데뷔작인 이 영화에서 특이한 캐스팅을 했다. 나름대로 캐릭터를 설정한 뒤 그들의 신체적 조건을 명시한 것이다. 그는 “그것이 연기력보다 중요한 문제였다”고 술회한다. 로즈마리 역의 미아 패로는 애초 그가 원한 배우가 아니었다. 그는 건강미가 엿보이는 전형적인 미국 여성을 캐스팅할 생각이었다. 결국 프로덕션디자이너 딕 실버트의 설득에 넘어갔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이 DVD에는 <미아와 로만>이라는 희한한 다큐멘터리가 실려 있는데, 영화의 제작과정을 두 사람에 초점을 맞춰 보여주는 것이었다. 물론 각각 샤론 테이트와 프랭크 시내트라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을 때였음에도 화면만 놓고 보면 둘은 마치 연인처럼 호흡을 잘 맞춰나갔다(어쩌면 이 다큐는 둘의 스캔들을 통해 상업성을 키우려는 윌리엄 캐슬의 마케팅 전략에 의한 것인지도 모른다).

폴란스키가 이 영화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점은 결말을 애매모호하게 처리하는 것이었다. 스튜디오는 썩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는 로즈마리가 주변 사람들의 음모에 빠진 것인지, 진짜로 악마들과 함께 살았고 악마를 낳은 건지 아니면 산후에 나타날 수 있는 정신병에 시달리는 것인지를 아리송하게 처리하려 했다. 그는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없는 열린 구조로 마무리를 지었다. 결국, 이러한 결말은 특수효과나 무시무시한 절규도 없는 <악마의 씨>를 최고의 공포영화 중 하나로 꼽히게 하는 큰 요소였던 것이다. 이 타이틀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서플먼트에 한글자막이 없고 영어자막만 있다는 점이다.

VOL6 |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광기와 아량을 배합한 공동연출

West Side Story/ 1961년/ 감독 로버트 와이즈, 제롬 로빈스/ 출연 내털리 우드, 리처드 비머/ 출시사 이십세기 폭스

1962년 오스카 트로피 10개를 쓸어간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상당한 우여곡절 끝에 탄생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동명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 시작됐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현대의 뉴욕으로 옮긴다는 컨셉의 이 인기 뮤지컬은 제롬 로빈스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영화화를 추진한 MGM은 애초 이 영화의 연출을 로버트 와이즈에게 단독으로 맡기고 로빈스는 안무가로만 기용하려 했다. 로빈스는 강력히 반발했고, 결국 공동연출이라는 흔치 않은 방식을 취하게 됐다. 스튜디오가 생각한 것은 로빈스는 뮤지컬 장면에, 와이즈는 드라마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과정은 순탄치 않았는데, 로빈스의 완벽주의적 성향 때문이었다. 엄한 발레학교 출신인 그는 무용수는 ‘발에 피가 날 때까지 춤을 추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생각을 했고, 배우들을 실제로 그렇게 상대했다. 배우들 생각엔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동작’을 그는 당연한 듯 요구했고, 낮에는 촬영을 밤에는 리허설을 끝도 없이 잡아나가 ‘노예감독관’이란 별명을 얻었을 정도다. 촬영과 리허설은 누군가 다치지 않으면 끝나지 않았고, 실제 꼭 누군가는 부상을 입었다. 로빈스는 완벽한 장면을 찾기 위해 필름을 돌리고 또 돌렸다. 일정은 늦춰지고 비용은 올라갔다. 다행히도 로버트 와이즈는 과묵하고 점잖은 성격이라 그의 열정을 제지하진 않았다.

결국 은행에서 더이상 추가 지원이 어렵다는 최종결정이 내려졌고, 로빈스는 쫓겨나야 했다. 그때가 촬영의 60% 정도를 끝마쳤을 때였다. 나머지는 와이즈의 몫이었다. <시민 케인> 등에서 편집을 담당했던 노련한 경력의 소유자답게 와이즈는 무난히 마무리를 지었다. 로빈스는 다시 촬영장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처지였지만, 와이즈의 배려로 편집에 참여하면서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다.

2001년 제작 40주년을 기념해 당시 출연배우와 와이즈 감독 등을 등장시켜 제작한 55분짜리 다큐멘터리 <웨스트 사이드 메모리즈>는 제롬 로빈스의 광기에 가까운 열정이 없었다면, 이 숨막히는 뮤지컬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와이즈의 아량이 없었다면 결코 성과를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좀처럼 성공하기 어려운 공동연출의 모범사례라 할 만하다.

VOL7 | <피츠카랄도>

재앙과 맞장뜨다

FITZCARRALDO/ 1982년/ 감독 베르너 헤어초크/ 출연 클라우스 킨스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출시사 알토 미디어

헤어초크와 루키 슈티페텍이 재앙의 제작기를 들려준다. 헤어초크는 아마존 밀림의 고무 거상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피츠카랄도>의 제작을 결심했던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배를 분해하여 다른 강까지 옮겨간 일이 있다는 사실이 더 흥미를 끌었다. 그 도전이 그를 흥분시켰다. 그뒤 제작이 시작되었고, 모든 것이 수난이었다. 피츠카랄도 역으로 등장하기로 했던 제이슨 로버츠는 병으로 중도하차했다. 그 상대역으로 예정되었던 믹 재거는 결국 공연 일정으로 오지 못했다. 잭 니콜슨은 아마존에 오는 것을 꺼려했다. 결국 선택한 것은 또다시 클라우스 킨스키였다. 하지만 아마존에서의 클라우스 킨스키라면 분명 미쳐버릴 것이라는 걱정은 현실이 되었고, 그는 미친 경주마처럼 이곳저곳을 후비며 싸움거리를 찾아다녔다. 수없이 물어뜯는 밀림의 모기떼들에 대해 얘기하던 중 던지는 한마디, “하지만, 클라우스 킨스키와 보내는 시간보다는 나았죠”. 그의 존재는 재앙 그 자체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클라우스 킨스키의 광기는 피츠카랄도를 살아 있게 했다. 헤어초크의 또 다른 한 마디, “클라우스 킨스키가 웃는 얼굴로 연기한 건 이 영화뿐이에요”.

<위대한 피츠카랄도>는 3년에 걸쳐 2척의 증기선을 만들었다. 또, 허허벌판에 1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캠프를 지어야 했다. 그리고 실제 원주민들을 동원해 통째로 산을 넘는 증기선의 장광을 연출했다. 강의 수량이 갑자기 불어날 때에는 한쪽에서 찍고 있던 카메라맨과 조수의 존재도 잊어버렸다. 다음날, “클라우스는 어딨어”라고 물은 뒤 다시 데리러 갈 정도였다. 메가폰도 없이 5천명의 엑스트라를 다루느라 200명을 데리고 소리치고 있을 때면, 4천명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비행기 사고가 두번 났고, 반신불수가 된 스탭이 있었고, 건기 때문에 강바닥에 주저앉은 배를 띄우기 위해 우기가 올 때까지 7개월을 버텼다. 급류 속에서 스탭들은 갈비뼈가 부러지고 뇌진탕을 일으키고 손이 끊어져 나갔다. 그렇게 찍고도 헤어초크는 인권침해의 죄명으로 법정에 출석해야 했고 매스컴의 비난을 받았다. <피츠카랄도>는 헤어초크가 선택한 재앙과의 맞장이었다.

VOL8 | <대부>

그가 옳았다!

Godfather/ 1972 / 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출연 말론 브랜도, 알 파치노, 제임스 칸, 로버트 듀발/ 출시사 파라마운트

<대부>의 ‘신인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목적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촬영장에는 언제든지 그가 해고되는 것에 대비하여 후속 감독이 함께 촬영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사쪽에서는 폭력이 약하다며 폭력장면 전문 감독을 데려오려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살얼음판이었고, 모든 과정이 설득을 요구했다. “당신 그 이야기 한번만 더 하면 모가지야”라는 엄포에도 불구하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대부의 역으로 말론 브랜도를 써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철수하지 않았다. “출연료 안 받고, 화면 테스트 받고, 보증금 내고, 촬영에 지장 안 준다면 한 번 고려해보자”는 승낙을 겨우겨우 얻어내고 나서야 말론 브랜도를 들여올 수 있었다(참고로, 한때 말론 브랜도는 클라우스 킨스키만큼이나 문젯거리였다). 신인감독 코폴라의 어려움은 여기까지가 아니었다. 영화사쪽은 마이클 역의 알 파치노의 내정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 밋밋한 청년보다는 좀더 어필이 가능한 라이언 오닐이나 로버트 레드퍼드가 어떻겠느냐고 압력을 넣었다. 세상에, 대부에 라이언 오닐과 로버트 레드퍼드라니! 게다가 제임스 칸(소니 역)은 마이클 역에 욕심을 내고 테스팅까지 받았다. 마틴 신도 테스팅에 응했다(더 재미있는 건 로버트 드 니로가 소니 역을 할 뻔했다는 사실이다. 그랬다면 아마 <대부2>의 돈 콜레오네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지 루카스의 부인이 충고한 한마디가 그의 확신을 부추겼다. “알 파치노로 해요. 눈빛으로 옷을 벗기는 재주가 있어요.”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카페에서의 첫 번째 살인장면 이후 누구도 알 파치노의 연기에 대해 딴죽을 걸지 못했다. 그뒤, 코폴라는 구로사와 아키라와 아서 펜의 영화에서 영감을 얻어 폭력신을 만들어냈고, 실제 딸과 아버지를 등장시켜 3편까지의 역사를 만들었다. <대부> 시리즈의 성공은 캐릭터의 성공이다. 코폴라가 옳았던 것이다.

VOL9 | <사랑은 비를 타고>

사람들이 화분에 물을 더 주었더라면?

Singin’ in the Rain/ 1952년/ 감독 스탠리 도넌, 진 켈리/ 출연 진 켈리, 스탠리 도넌, 데비 레이놀즈/ 출시사 워너브러더스

“스릴 넘치는 사상 최대의 춤 공연”, “다시는 만들어질 수 없는 할리우드 최고의 뮤지컬”이라는 광고문구에 이의를 제기할 이유가 없는 <사랑은 비를 타고>. 그렇지만 그 뮤지컬의 신기원은 “MGM에서 만들어지고 있던 다른 평범한 뮤지컬과 다를 바 없을 것”이라는 무관심에서 시작됐다. 진 켈리와 스탠리 도넌의 현란한 스탭을 따라잡기 위해 석달간 춤연습에 매진하고, 14시간 첫 촬영 뒤 피투성이 발바닥을 어루만져야 했던 여주인공 데비 레이놀즈, 이제는 목소리에도 주름이 고인 그녀를 따라 다시 회고해보는 <사랑은 비를 타고>의 제작기.

<오즈의 마법사> 등으로 “MGM에서는 신과 같은 위치”에 있었던 작사가 아서 프리드와 작곡가 나치 허브 브라운이 구상한 <사랑은 비를 타고>의 음악들은 그 전작 를 토대로 두었다가 바뀐 경우이다. 당시 빈센트 미넬리의 뮤지컬 <파리의 미국인>을 촬영 중이던 진 켈리는 대본을 보고서야 참여를 결정했고, 놀라운 일이지만 비 속에서 춤추고, 우산을 돌리며 사랑을 노래하던, 그래서 수없이 많은 영화들이 베끼고 또 베꼈던 그 유명한 진 켈리의 <싱잉 인 더 레인> 버전은 처음에는 각본상 아예 있지도 않았다. “어쨌든 그 장면을 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건 노래 때문이 아니라 비 때문이었다!? <사랑은 비를 타고>는 무더운 여름 한철, 밤장면을 낮에 찍고 있었다. 그런데 매일 5시쯤 되면 사람들이 낮 동안 메말랐던 화분에 물을 주느라, 영화가 필요로 하는 양만큼의 물을 댈 수 없을 정도였다. 물을 틀어봐야 방울만 똑똑 떨어졌다고 하니. 다행히 그 날은 날씨 덕분에 그 장면을 찍을 수 있었지만, 사람들이 화분에 물만 조금 더 주었더라도, 우리는 영화사의 명장면을 볼 수도, 기억할 수도 없었을지 모를 일이다.

VOL10 | <위대한 환상>

필름으로 복원된 환멸의 체험담

Grand Illusion/ 1937년/ 감독 장 르누아르/ 출연 장 가뱅,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 출시사 스펙트럼

<위대한 환상>에는 제작 이전에 필름 복원에 대한 사연이 있다. 어느 날, 르누아르는 한통의 편지를 받는다. 전쟁 중에 원본을 분실한 <위대한 환상>의 필름을 갖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그것도 다양한 버전의 편집본이 아닌 원본 그대로의 필름을. 미군 홍보영화를 담당하던 그 여대위로부터 필름을 돌려받지 않았던들 르누아르의 <위대한 환상>을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이야기를 르누아르 자신이 직접 들려준다는 사실이다. 한편, 영화이론가 피터 코위는 영화의 장면들을 따라가며 르누아르와 <위대한 환상>을 소개한다. 실제로 1차대전 동안 정찰병이기도 했던 르누아르는 전시 동안 자신을 구해준 ‘팬사 대위’라는 사람을 모델로 이 영화의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거기에 자신의 경험을 덧붙였다. 그래서 영화 속 마레샬로 등장하는 장 가뱅은 실제로 르누아르가 전시에 입었던 그 가죽 점퍼를 입고 나와 감독의 경험을 대신한다.

파리에서 만난 제작부장의 권유로 <위대한 환상>의 독일 장교로 출연하게 된 배우겸 감독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에게 르누아르는 군인들의 행진소리만 점점 더 크게 들려오는 빈 화면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리고는 “다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영화에도 “나는 행진소리가 싫다”는 장 가뱅의 대사를 넣었다. 르누아르는 단순히 전쟁이 아니라, “인간의 관계”를 해치는 전쟁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그래서, 르누아르는 영화제목을 쉽게 정하지 못했다. 마지막 장면에 와서야 <위대한 환상>이라고 결정지었다. 이것이 “마지막 전쟁이길 바란다”는 마지막 대사에서 제목을 결정지은 것이다. 원래 대본에서는 마레샬과 로젠탈이 종전 뒤, 첫 번째 성탄절에 다시 보자는 약속을 하지만, 영화는 그 말을 삭제했다. “전쟁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이라는 것이다. 르누아르는 말한다. “1936년에 평화의 중요성을 깨우치기 위해 <위대한 환상>을 만들었고, 또 성공했다. 하지만 3년 뒤 2차대전은 발발하고야 말았다.”

▶ DVD 완전정복 3탄 - 걸작들의 탄생비화 [1]

▶ DVD 완전정복 3탄 - 걸작들의 탄생비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