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분량의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독립애니메이션 감독이 들여야 하는 수많은 노고를 그 누가 알랴. 그래서 애니메이션이라는 예술 장르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삶의 교훈이 있다면 ‘혼자 살긴 힘들다’는 것 아닐까.
‘일렉트릭 서커스’(Electric Circus)는 그런 지혜를 일찌감치 터득한 독립애니메이션 제작팀이다. 팀의 구성원인 김운기(32), 박현경(32), 한진현(35)씨는 1999년 가을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워크숍에서 처음 만났다. 김씨는 캐나다에서 영상음악 등 포스트 프로덕션을 전공했고, 공주대 만화학과 1기인 박씨는 국내 유수의 OEM업체에서 10년 가까이 원동화를 그려왔다. 한씨는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0년 넘게 자신의 그림세계를 만들어오고 있었다.
“수료하면서 각자 작품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자기 작품에서 부족한 점과 그것을 메워줄 방법을 두고 고민을 시작했죠. 그러면서 저희는 부부가 됐고 프랑스로 떠나 그림 공부 중이던 진현씨를 꼬드겨 팀을 만들게 됐습니다.”
“그림이 위주인 제 작품에서 캐릭터의 움직임을 보완하고 싶었지요. 그래서 제의를 받고 이 ‘늪’에 제대로 빠져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애니메이션 업계에서의 풍부한 경험, 독특하고 몽환적인 색채와 구도, 심금을 울리는 음악과 연출력이 하나로 뭉쳐 만들어낸 첫 작품이 <배낭을 멘 노인>(The Oldman with Knapsack)이다. 11분16초짜리 이 작품은 영화아카데미 애니메이션 전공 3기로 입학한 박씨의 졸업작품이기도 하다.
“제가 이 작품에 애착이 많았어요. 그래서 남들 세 작품을 할 때 이거 하나 만든다는 생각으로 모든 정성을 쏟아부었습니다.”
자기 몸의 두배가 넘는 커다란 배낭을 멘 노인이 마을에 나타나자 모든 이들의 관심이 노인과 배낭으로 향한다. 애들을 죽여 잡아가는 할아버지라고 동네 아이들은 지레짐작하기도 한다. 노인이 죽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모여 배낭을 연다. 과연 배낭에서 나온 것은 무엇일까.
“우리 모두가 짊어지고 살아가는 삶의 무게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죽어서도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그런 굴레 같은 거죠.”
대사가 없는 이 작품에서 분위기를 전해주는 것은 음악이다. <알레그리아>라는 영화에 나오는 오페라곡을 편곡해 사용했다는 것이 김씨의 설명. 음악을 먼저 생각하고 작품의 톤을 잡았다고 덧붙였다. 막판에 제작비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선뜻 도움을 준 한신코퍼레이션과 플러스원, 디지털 오디세이에 대한 고마움은 꼭 갚고 싶단다. 이 작품은 영화아카데미 졸업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고 지난 5월에는 미국 칼라마주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졸업 경쟁부문에서 금상을 받았다. 브라질 아니마문디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경쟁부문, 덴마크 오덴스국제단편영화제 단편 경쟁부문 등 세계 각국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 줄줄이 터질 상복을 기다리고 있다.
‘일렉트릭 서커스’의 다음 작품은 이상한 바다에 사는 노인과 고양이의 이야기를 다룬 ‘그들의 바다’(가제). 현재 기초 시나리오와 캐릭터 작업 중이다.
“내가 다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니 좋은 점이 많아요. 각자 잘하는 부분을 살리니 완성도는 높아지죠. 혼자 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소품을 만들면서 아쉬움을 달래죠. 저희 팀은 이렇게 달려갈 겁니다. 앞으로도 쭈∼욱.” 정형모/ <중앙일보> 메트로부 기자 hy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