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 1987년, 감독 페르난도 솔라나스
출연 로베르토 고제네체
EBS 5월19일(토) 밤 10시
“영화산업과 협동작업보다는 개인과 작가, 그리고 진실을 옹호한다.” 페르난도 솔라나스 감독이 주장했던 ‘제3세계영화론’은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요즘 같은 시대에 무슨 궤변인가, 하고. 그렇지만 솔라나스 감독의 작품활동이나 이력을 들여다보면 일견 숙연해지는 구석이 있다. 원래 음악공부를 했던 페르난도 솔라나스 감독은 미국영화를 ‘배부른 부르주아들의 영화’라고 공격하면서 제3세계 영화론을 표방했으며 옥타비아 젠티노와 함께 남미 기록영화의 걸작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1969)를 만들었다. 영화의 정치성과 권력에 대한 저항에 주력하는 그의 작품성향은 당연히 아르헨티나 독재정권과는 상충되었고, 솔라나스 감독은 조국에서 영화를 만들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솔라나스 감독을 기다린 건 오랜 정치적 은둔과 망명생활이었다. <남쪽>은 1980년대 중반 솔라나스 감독이 아르헨티나의 품으로 돌아와 마치 한장의 연서를 쓰듯 조국에 무한한 애정을 표한 작품이다. 험난한 정치사를 배경으로 남녀의 애정이야기를 풀어가면서 결국 한편의 신화로 승화시키는 <남쪽>은 영화 전편에 흐르는 탱고음악의 비장한 선율이 매혹적이면서 쓸쓸하다.
아르헨티나에서 군사독재가 막을 내린 뒤 플로리알은 감옥에서 석방된다. 정치범으로 수감되었다가 5년 만에 풀려난 것.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를 방황한다. 플로리알은 동료들의 허무한 죽음, 그리고 아내의 부정을 알게 된 탓에 현실로 되돌아온 것이 못내 어색하기만 하다. 거리를 걸으면서 플로리알은 옛 동료의 환영을 만나고 그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다. 한편 아내 로지는 남편의 출감 소식을 듣고 불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남쪽>은 한편의 음악영화로 봐도 좋다. 영화음악을 작곡한 아스토르 피아졸라는 ‘새로운 탱고’라는 이름으로 아르헨티나 탱고에 유럽 고전음악의 형식미를 덧입힌 음악가다. 영화엔 네스토르 마르코니, 피토 파에즈, 로베르토 고제네체 등의 음악인이 직접 출연하고 있다. 이중에서 로베르토 고제네체는 탱고음악 거장으로 추앙받는 가수인데 그 목소리를 유심히 들어볼 필요가 있다. 가수로 활동하던 로베르토 고제네체는 성대가 노래를 부를 수 없을 만큼 손상된 이후 오히려 아르헨티나 국민가수 반열에 오른 독특한 인물이다. 목소리 자체에 고통스런 영혼이 담겨 있다고 표현해야 할까? 페르난도 솔라나스 감독은 영화의 비서사적인 원칙을 줄곧 지키되, 실연과 망향의 가사를 담은 탱고음악과 춤을 영화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작품의 서정성을 극대화한다. 이런 점에서 <남쪽>은 탐미주의와 리얼리즘 사이에 기묘하게 무게중심을 잡은 영화라고 할 만하다.
<남쪽>은 순수한 거리의 영화다. 플로리알은 길 위에서 과거의 기억과 재회하고 음악인들은 길가에서 플로리알을 위한 곡을 연주한다. 탱고음악은 길과 술집, 그리고 복도에서 꿈결처럼 흘러나온다. “널 잊기 위해 남쪽으로 갈 거야”라고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흥얼거린다. <남쪽>은 페르난도 솔라나스 감독이 아르헨티나 문화, 특히 탱고음악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실어 아르헨티나의 참혹한 과거를 이야기하는 영화다. 이정도로 시청각적인 포만감을 가득 안겨주는 영화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김의찬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