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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영화] 공포보다 슬픔이...<4인용식탁>
2003-08-05

사람들은 겪었기 때문에 믿는 게 아니에요. 그게 뭐든지 감당할 수 있을 때만 뭔가를 믿어요.”

영화 속에서 연(전지현)이 하는 이 말은 일종의 키워드다. 그러면 감당할 수 없어서 믿지 않고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또는 지워버리려고 하는 일들이 자꾸만 눈 앞에서 나타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정원(박신양)은 막 결혼을 앞둔 인테리어 디자이너이다. 지하철에서 졸다가 종점까지 갔다. 아무도 없는 열차에 어린아이 둘 만 자고 있다. 막 잠에서 깨어나 정신이 덜 든 정원은 그 아이들을 놓아두고 내렸다. 다음날 그 아이들이 지하철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는 보도가 나온다. 그날 저녁부터, 결혼해서 살 집에 약혼녀가 정성스럽게 꾸며놓은 식탁(4인용)에 그 아이들이 앉아있는 걸 보게 된다. 여차저차해서 알게 된 연이 그 집에 들렀을 때, 연은 “(식탁의) 아이들 침대에 눕혀야겠네요”라고 말한다.

에서 공포의 근원은 가족이다. 인물들이 안고 있는 상처와 두려움은 대부분 망각의 늪 바닥에 던져놓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연유한다. 죽은 아이들이 정원을 찾아온 건, 정원이 잊고 지내던 어린 시절 자신의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 신기가 있는 연을 만나, 정원은 그 끔찍한 사연을 되살리게 된다. 성장의 공포를 담은 단편 <>와 중편 <물안경>으로 주목받았던 감독 이수연은 스스로 각본을 쓴 장편 데뷔작에서 그 공포를 극한치까지 밀어붙인다. 감독은 미스테리적 구성으로 긴장감을 놓지 않으면서 흔한 공포영화의 관습을 거부하고 자신의 주제를 앞뒤 꽉 짜인 영화에 녹여놓았다. 멍한 표정으로 아이의 잡은 손을 놓아버리는 엄마,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하는 여자의 기이한 미소, 정원의 기억 속에 숨겨져 있던 동네 꼬마와 아버지의 처참한 죽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극단화된 설정을 감독은 절제된 화면으로 관객 앞에 들이댄다. 인물들은 가장 신뢰받고 싶은 친밀한 존재로부터 불신받고 외면받으면서 버티기조차 힘든 삶으로 내몰린다. 그걸 볼 때 밀려오는 건, 공포라기보다 살을 슥 베어가는 슬픔이다.

은 우리의 믿음에 균열을 가하는 영화다. 모성애 신화도 마찬가지다. 연과 언니동생처럼 지내던 정숙(김여진)은 아이를 낳은 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아기가 자신에게 매달릴 때마다 두려워한다. 그것 역시 잊고 지내던, 자신의 과거의 기억과 맞물려 있다. 연을 통해 그 과거를 알게 됐을 때, 끔찍한 기억과 아기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반쯤 미쳐 모성애를 정면으로 배반한다. 그걸 기괴하게 높이 뻗은 아파트의 베란다 앞에 선 정숙의 표정 하나로 보여준다. 박신양의 연기는 믿음직하며, 화장도 않고 머리를 아무렇게나 틀어올린 전지현은 외롭고 신비한 연으로 성공적인 변신을 했다.

상영시간 내내 안단테의 빠르기로 일관하는 이 영화가 지루할 때도 있다. 슬프고 애처롭지만 끔찍한 상황으로 모든 인간들을 몰고가는 것이 지독하게 보이고, 여백없는 이야기가 보다 긴 여운을 남기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독하게도 영화는 아픈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지 않는다. 아니, 그건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저 자신이 그 상처와 대면할 수밖에 없다. 그토록 피하려고 했던 이들과 함께 식탁 앞에 앉게 된 정원처럼. 한국영화계는 뚝심있는 여자감독 한 명을 맞게 됐다. 8일 개봉.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