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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1]

거장인가? 사기꾼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도그빌>로 다시 논쟁의 중심에 선 라스 폰 트리에, 열광과 혐오의 이유들

소문대로다. 라스 폰 트리에는 다시 도발적인 영화를 내놓았다.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나왔던 <도그빌>은 관객의 극단적 반응을 예고하는 작품이다. ‘영화언어의 혁신을 이룬 걸작’이라는 찬사와 ‘철학의 빈곤을 드러낸 가짜 예술품’이라는 비판이 트리에의 다른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듯 으르렁댄다.

<뉴욕타임스>의 평론가 A.O.스콧은 올해 칸영화제를 취재한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칸영화제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그 장대한 규모와 더불어 논쟁적 영화를 선호하는 취향이다. 그리고 이것이 칸영화제가 트리에를 그처럼 환영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중략) 칸영화제에서 월요일에 있었던 <도그빌> 시사회는 전류가 흐르는 듯한 순간이었다. 마침내 논쟁거리가 생긴 것이다. <도그빌>은 냉소주의에 기반한 가학적이고 자의식으로 뭉쳐진 실습작인가? 아니면 권력, 순수, 복수의 본질을 파헤치는 혁신적인 작품인가? 도그마95 이론의 수장이며 교활한 앞잡이인 트리에는 세계사에 남을 천재인가? 아니면 교활한 지적 사기꾼인가?”

실제로 <버라이어티>의 평론가 토드 매카시와 <빌리지 보이스>의 평론가 짐 호버먼은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내렸다. “<어둠 속의 댄서>에서 사형제도를 비판한 뒤, 트리에는 <도그빌>에서 정반대로 사형제도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도그빌>은 미학적 실험과 더불어 미국적 가치의 이데올로기적 종말을 향해 한방을 날린다는 의도가 명백하지만 미학적 성취에서 부끄러운 결과를 낳은 점도 분명하다. 이 덴마크 작가는 <도그빌>에서 미국, 권력, 오만함, 은총, 자비, 용서, 복수, 진실, 심판 등 얼핏 보기에도 굉장히 많은 문제를 던지지만 그가 이런 문제를 씹어서 뱉는 방식은 전과 다름없다. 그것은 선동을 한다는 목적으로 정교하게 고안된 것이다.”(토드 매카시) “단 하나의 세트에서 훌륭하게 연출된, 3시간 가까운 상영시간 가운데 단 1분도 지루하지 않은 <도그빌>은 수난으로 이뤄진 작품이지만 엔드 크레딧을 위해 카타르시스를 아껴둔다. 팝뮤직과 사진 이미지가 나란히 등장하는 엔드 크레딧은 <도그빌>이라는 매트릭스에 파열구를 낸다. 트리에의 타이밍은 섬뜩하다. 흔히 얘기하듯 미국은 지상에서 가장 기독교적인 나라이며 <도그빌>은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해한다.”(짐 호버먼)

<도그빌>

문제의 영화 <도그빌>은 설정에 익숙해지기까지 얼마 동안 마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의 세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준다. 무대는 있지만 배경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평평한 무대바닥에 분필로 선을 그어놓고 이곳이 로키산맥에 위치한 마을 도그빌이라고 말한다. 거기엔 집도, 창문도, 문도 없지만 배우들은 그것들이 있는 양 행동하고 연기한다.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릴 때 관객은 문을 여닫는 시늉을 하는 배우들만 보게 된다. 내레이션은 대담하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있다’고 여기라고 주문한다. 아무도 임금님이 벗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답답함,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무대장치에 친숙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프롤로그와 9개의 장으로 나눠진 이야기는 동화구연을 하는 듯한 해설자의 음성과 배우들의 진지한 연기가 맞물리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리고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세트 못지않게 당황스럽다. 도그빌을 찾은 낯선 여인 그레이스는 도그빌 주민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주민들의 이기심과 욕정으로 인해 잔인한 학대에 직면한다. 사람들은 강간당하고도 항변하지 못하는 불쌍한 그녀의 목에 쇠종이 달린 개목걸이를 단다.

<도그빌>은 트리에가 미국에 관한(USA) 삼부작 가운데 첫 번째로 만든 작품(U에 해당)이다. 인간을 개로 취급하는 마을, 도그빌이 현실의 미국이라는 그의 주장은 엔드 크레딧이 오를 때 등장하는 대공황기 미국인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과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 <영 아메리칸>으로 대변된다. 혹시 USA 삼부작의 부제가 “나는 고발한다. 미국의 죄악을!”이 아닌가 싶은 공격적 태도는 칸영화제에서 밝힌 그의 말로도 확인된다. “나는 미국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부시가 그렇게도 논해왔던 적국들보다 악하지 않다고 보지도 않는다. 나는 인간이란 어디에서나 얼마간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미국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권력은 부패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이들이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내가 미국에 해를 가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조롱은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도그빌>의 비판자들은 트리에가 미국을 조롱한다는 사실을 문제삼지는 않는다. <필름코멘트>에서 평론가 켄트 존스는 <도그빌>에서 비판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라크를 공격한 현실의 미국이 아니라 인간의 나쁜 본성 자체를 공격하는 영화로 보이기 때문이다. 트리에 역시 “도그빌이 미국일 수도 있지만 다른 나라의 어느 마을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혼란을 불러올 만한 말이지만 <도그빌>은 그만큼 모호한 면을 갖고 있다. 이 영화는 엔드 크레딧만 떼어내면 반미와 별 관련이 없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미국에 대한 그의 비판은 단지 언론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인가? 그는 정말 평론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호객행위를 하고 있는 것인가? 혼란을 정리하자면 몇 가지 쟁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왼쪽부터 <브레이킹 더 웨이브>, <어둠속의 댄서>

1. 트리에는 파시스트인가?

<도그빌>의 이야기는 대공황기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전제하고 있지만 구약성서의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를 각색한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타락에 노한 하나님이 도시를 송두리째 없애버린 것처럼 영화는 타락한 마을 도그빌은 지상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결론내린다. 그런데 과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구약성서식 세계관은 세상의 악을 몰아내는 데 일조할 수 있는가? 토드 매카시가 지적한 대로 이것은 <어둠 속의 댄서>에서 비판했던 그 사형제도를 옹호하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또한 파시스트 국가(악의 축!)는 전쟁과 같은 파시즘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은 부시 행정부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악마와 싸우려면 악마가 돼야 한다? 트리에가 파시즘에 매혹을 느낀다는 주장은 <도그빌>에서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니다. <유로파>가 나왔을 때도 좌파 진영에선 그를 파시스트로 단정했다. 전후 독일의 모습이 만들어내는 좌절과 허무가 파시즘에 대한 향수처럼 보인 것이다.

하지만 정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 트리에의 열렬한 지지자 민규동 감독은 곧 출간될 책 <도그빌북>에서 예수처럼 느껴지는 그레이스를 미국의 표상으로 이해한다면 트리에는 신이 보잘것없는 인간성 이상의 본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도그빌>을 종교적 우화를 가장해 구약성서식 논리를 비판하는 영화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 스코틀랜드 교회를 비판하던 장면을 떠올리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도그빌>이 브레히트의 연극 <서푼짜리 오페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대상을 거리를 두고 관찰하게 만드는 브레히트의 방법대로 <도그빌>은 무대장치를 의도적으로 노출한 영화다. 현실이 아니라 연극이고 영화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본다면 <도그빌>에서 그레이스의 복수는 카타르시스로 이어지지 않는다. 관객은 제3자의 시선으로 도그빌 주민의 잔인함과 그레이스의 복수가 합당한 것인지 생각할 기회를 얻었을 뿐이라는 해석이다.

2. 트리에는 사디스트인가?

골든하트 3부작에 이어 <도그빌>에서도 관객은 너무 착해서 희생양이 되고 마는 여자를 만난다. 그레이스가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베스나 <어둠 속의 댄서>의 셀마와 다른 점은 극의 말미에 드러날 뿐이다. 트리에의 여인들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다 피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할 뿐 아니라 불편하게 한다. 어째서 그의 여인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착해야 하는가? 트리에 영화에 대한 열광과 혐오는 여기서 확연히 갈린다. 2000년 칸영화제에서 한 여성기자는 트리에에게 “당신은 왜 <브레이킹 더 와이프>라 불릴 만한 영화들을 만드느냐”고 질문했고 답변은 “나도 모른다”였다. <어둠 속의 댄서>를 찍을 때 주인공 비욕과 트리에의 갈등이 화제가 된 것도 여주인공에 대한 가학적 태도가 촬영과정에도 반영됐으리라는 의구심 탓이 크다. 올해 칸영화제에선 니콜 키드먼이 USA 3부작의 남은 2편에도 출연할 것인지에 관심이 집중됐다. 트리에는 키드먼의 출연을 거듭 확인했지만 그녀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고 최근 키드먼의 출연이 무산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칸영화제에서 <도그빌> 상영 때 키드먼이 영화를 다 보지 못하고 나왔다는 사실을 보도한 <뉴욕타임스>의 기사에서도 행간의 의미가 눈에 띈다. 기사는 키드먼이 트리에의 다음 영화에 출연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암시했다.

하지만 트리에 영화가 눈을 의심할 만큼 생동감 있는 연기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어렵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가 다다른 기적의 순간, <백치들>에서 백치의 삶이 고결해 보이는 역설, <어둠 속의 댄서>의 처절한 비극, <도그빌>에서 그레이스의 수난과 복수는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주인공의 절절한 연기로 인해 설득력을 갖는다. 거꾸로 트리에의 여인들이 만들어내는 성스러운 분위기는 가학적 현실과 대비를 이룬다. 세속의 가치판단에 물들지 않은 그들의 고결한 영혼은 ‘선’(善)을 추구한다고 내세우는 사회와 종교와 법질서가 순결하지 않다는 점을 고발한다.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평론가 호세 아로요는 이렇게 썼다. “칼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 수난>(1927)에서처럼, 얼굴이 말해주는 것이 바로 영화의 진실이다. 그것은 사회가 지키고 보호한다고 말한 그 사람을 죽이고 압살하는 것이 다름 아닌 그 사회라는 고발이다.”

3. 트리에의 형식실험은 성공했나?

널리 알려진 대로 데뷔작 <범죄의 요소>에서 <유로파>까지 3편의 영화에서 기교중독자라는 평판을 얻었던 트리에는 TV시리즈 <킹덤>을 거쳐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 이르면서 이전과 전혀 다른 영화를 만들었다. 이야기와 캐릭터가 볼품없다는 비판에 답하기라도 하듯 <킹덤>의 이야기와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캐릭터는 강렬했다. 이후 <도그빌>까지 트리에는 이미지를 조작하는 기교를 거부하는 대신 카메라를 최대한 인물에 밀착시켰다. 이미지는 점점 지워졌고 인물은 그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졌다. 디지털카메라는 트리에의 새로운 무기로 <도그빌>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관객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 영화에 배경이 없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트리에가 영화적 기교에서 멀어진 과정은 그 자체로 논란거리다. 지지파는 여기서 그 근원에서부터 영화의 본질을 되묻는 숭고한 태도를 발견하는 반면 반대파는 이미지의 죽음을 미학적 파산선고로 여긴다. 의 평론가 케네스 튜란이 <어둠 속의 댄서>를 혹평하면서 밝힌 입장은 트리에의 형식실험이 어떻게 비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한마디로 제리 브룩하이머가 로베르 브레송의 흉내를 낸 것 같다는 것이다. 주인공 셀마가 비극의 수렁에 빠지는 과정이 여러 가지 비약으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은 이런 혹평의 진원지다. 아마 <어둠 속의 댄서>를 <아이 엠 샘>과 비교해본다면 이런 비판이 무엇을 지적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도그빌> 역시 이같은 논란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도그빌 주민들과 그레이스의 심경의 변화를 설명할 때 등장하는 내레이션은 과연 얼마나 ‘영화적’인 것인가? 트리에는 “만약 특정한 연출방식으로 영화를 낯설게 보이게 만든다면 다른 모든 것은 정상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멜로드라마의 관습에 의존하는 이야기는 트리에의 실험에서 불변의 요소인 셈인가? 아니면 사유의 빈곤, 철학의 부재를 위장하는 말일 뿐인가?

라스 폰 트리에 Filmography

1956년 출생 | 1984년 <범죄의 요소> | 1987년 <메데아>(TV) | 1988년 <전염병> | 1991년 <유로파> | 1994년 <킹덤>(TV) | 1996년 <브레이킹 더 웨이브> | 1997년 <킹덤2>(TV) | 1998년 <백치들> | 2000년 <D-Dag-Lise>(TV) | 2000년 <D-Dag>(TV) | 2000년 <어둠 속의 댄서> | 2003년 <도그빌>

<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1]

<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2]

<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3]

<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