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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4]
김혜리 2003-08-01

“래커칠 상할까봐 스탭들 양말 바람으로 다녔어”구상에서 시사회까지, 영리한 실험 <도그빌>의 전말

“이게 다 뭐 하는 짓이요?” 친구 니콜 키드먼을 위문하기 위해 베를린영화제에서 곧장 전용기를 타고 스웨덴의 <도그빌> 세트를 방문한 러셀 크로가 내지른 일성이었다. 그를 특별히 무례하다고 욕할 수는 없다. 그를 맞이한 것은 글씨로 쓴 ‘개’가 짖어대는, 벽도 없는 집들의 마을이었으니까. 사실 <도그빌>의 세트에 처음 도착한 배우들이나 <도그빌>을 처음 본 관객의 머릿속을 지나간 첫마디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러셀 크로의 질문 아닌 질문에 붙일 수 있는 하나의 답은 ‘실험’이다. 실험의 목적이 무엇이건 라스 폰 트리에는 가운을 걸친 실험실의 과학자처럼 영화를 만들어왔고 <도그빌>을 만들었다. 햇빛과 물과 흙이 식물의 생장에 필수적인지 알기 위해 딱 하나씩 조건을 통제하며 강낭콩 싹을 관찰했던 초등학교의 과학 실습시간처럼. “한 가지 방식으로 영화를 낯설게 만든다면 다른 모든 것은 정상적이어야 한다. 너무 층이 많으면 관객은 더 멀어진다. 너무 많은 것을 동시에 실행해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라스 폰 트리에의 말이다. 다음은 그가 최근 행한 영리한 실험의 전말기다.

Chapter1 : 구상

2000년 칸영화제. <어둠 속의 댄서> 상영이 끝나고 열린 리셉션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격분했다. 일부 미국 저널리스트들이 다가와 “미국에 가본 적도 없는 당신이 어떻게 미국을 비판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가?”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미국인들도 카사블랑카에 가보지 않고 <카사블랑카>를 만든 전력이 있다. 게다가 남의 나라에 가보지 않고 그 나라에 관한 영화를 찍는 일이야말로 할리우드가 늘 해온 일이다.” 한마디로 긁어 부스럼이었다. 오기가 난 라스 폰 트리에는 <어둠 속의 댄서>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겠다는 계획을 철회하고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한편 더 찍기로 했다. 그렇다면 어떤 영화를? 구체적 영감은 라스 폰 트리에가 덴마크 포크송 가수 세바스천의 <히트 송 모음집>을 감상하던 중 찾아왔다. 세바스천의 음반에는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쓰고 쿠르트 바일이 음악을 만든 <서푼짜리 오페라>에 나오는 노래 <해적 제니>를 새롭게 편곡한 버전이 들어 있었다. ‘해적 제니’의 복수극 내러티브와 브레히트식 연극이라! 1930년대 대공황기의 로키산맥의 외딴 마을을 무대로 설정한 라스 폰 트리에는, 고립된 장소에 관한 영화 <도그빌>의 형식도 고립시키고 싶었다. 로키산맥 따위엔 가고 싶지도 않다. 지도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스토리를 풀어가자. 한대의 카메라 앞에 단순한 회색 배경을 드리우고 배우 둘이서 끌고가는 1970년대 TV 연극에 대한 향수도 끼어들었다. 라스 폰 트리에에겐 극장에서 보는 연극보다 TV나 영화 속 연극이 흥미로웠다. 세트는 극히 연극적이지만 대신 카메라의 클로즈업으로 비쳐질 연기는 미니멀하고 사실적인 영화. 라스 폰 트리에는 모든 것이 기술 덕택에 쉽사리 ‘영화적’으로 둔갑하는 시대에 <도그빌>의 형식이 영화의 돌파구에 대한 한 제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Chapter 2 : 캐스팅

<도그빌>의 그레이스, 니콜 키드먼은 <어둠 속의 댄서>에서 주연한 비욕의 반대말이나 다름없었다. 비욕은 영화에 대해 눈곱만큼도 욕심이 없었지만, 니콜 키드먼은 막 스스로를 예술가로 자부하기 시작한 야심만만한 배우였으며 철저히 준비된 프로페셔널이었다. 라스 폰 트리에는 <도그빌>의 그레이스를 니콜 키드먼을 염두에 두고 썼다. 냉정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온 키드먼을 바꿔놓는 일도 흥미로웠고 무엇보다 그야말로 볼거리가 전무한 황량한 영화 <도그빌>에서 할리우드 스타 키드먼은 유일한 스펙터클이 될 것이다. <도그빌>의 캐스팅은 작가로 불리기 원하는 모든 감독들의 백일몽과 같았다. 라스 폰 트리에가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을 보고 매혹된 벤 가자라, <대부>의 제임스 칸, 인디영화계의 신성 클로에 셰비니, <뷰티풀 마인드>의 폴 베타니가 합류했고 원로배우 로렌 바콜은 미미한 극중 비중에도 불구하고 캐스팅을 수락했다. “라스 폰 트리에는 배우를 아주 잘 다루니까”라는 동료배우 스텔란 스카스가르드의 추천에 톰 역을 받아들인 베타니는 얼마 뒤 낙담했다. “배우를 잘 다룬다고? 거의 말도 안 거는데?” 스카스가르드는 태연히 받아쳤다. “그렇지? 배우 참 못 다루지? 같이 해보라고 거짓말한 거야.” 베타니는 기가 막혔지만 8주 뒤에는 자신도 동료배우에게 스카스가르드와 똑같이 조언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45분 동안 계속 카메라를 돌리고 그 가운데 배우가 전혀 의식 못하는 2, 3분을 골라 쓰는 라스 폰 트리에와 일하면서 배우들은 연기 안 하는 법, 이런저런 감정의 조각을 표출하며 완전히 영화의 도구가 되는 법을 발견했다. “<도그빌>은 배우들이 모여 라스 폰 트리에 감독에게 바치는 오마주와 같다.” 모자를 눌러쓰고 이름도 없는 갱스터로 출연한 우도 키에르의 말이다.

Chapter 3 : 세트 + 촬영

프리세일을 위해 찍은 테스트 촬영분을 본 사람들은 <도그빌>이 상당히 특이한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화면에 잡힌 <도그빌>의 세트라는 것이, 마치 교통사고 현장에 흰색 스프레이로 그린 테두리마냥, 백묵으로 거리와 집터를 그려놓은 것이 전부였으니 무리도 아니다.

<도그빌>은 ‘트롤리우드’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스웨덴판 할리우드’의 일부인 트롤해탄 지역의 사운드 스테이지에서 6주(31일) 동안 촬영됐다. 스칸디나비아 역사상 가장 비싼 영화라는 <도그빌>의 세트는 몇몇 소도구를 제외하면 벌거벗은 상태에 가까운 가로 30m 세로 60m의 플랫폼이었다. 배우를 제외한 스탭들은 세트장에서 검은 래커칠을 한 바닥이 상할까봐 양말 바람이나 슬리퍼를 착용하고 다닌다고 <사이트 앤 사운드>에 실린 현장방문기는 전하기도 했다.

덕분에 <도그빌> 제작진은 우천시 촬영 연기를 걱정하거나 좋은 광선을 포착하기 위해 하루종일 해바라기만 하는 수고는 면할 수 있었다. 한때 감독이란 모니터 뒤에서 배우와 멀찍이 떨어져 일하는 편이 영화를 위해 이롭다고 주장했던 라스 폰 트리에는 <도그빌>에서 직접 카메라와 장비를 메고 배우들에게 바짝 붙어 필요하다면 그들의 몸을 손으로 밀고 다니기까지 하며 세트를 누볐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과 앤서니 도드 맨틀 촬영감독은 HD카메라를 선택했다. “<어둠 속의 댄서>는 근사한 풍광을 흐릿한 해상도로 찍었으니, 감상할 경치라고는 전무한 <도그빌>은 고해상도가 필요하다”는 원칙이었다. 그러나 카메라가 워낙 무겁다보니 소소한 장면에서는 소형 디지털카메라가 동원됐다.

꽉 짜인 <도그빌>의 촬영 스케줄에도 청천벽력이 하나 있었다. 베라 역을 연기한 카트린 카트리지(<네이키드> <웨이트 오브 워터> 등에 출연)가 발작을 일으킨 아버지를 간호하러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카트리지 자신도 6개월 뒤 폐렴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비운을 맞았다). <도그빌>의 스탭과 배우들은 패트리샤 클락슨을 새로운 베라로 맞아 카트리지의 촬영분을 몽땅 새로 찍어야 했다. <도그빌>의 배우들은 세트에서 수킬로미터 떨어진 장원의 저택에서 촬영 이외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니콜 키드먼은 “호주에서 찍은 데뷔 초 영화 이후 이런 친밀함은 처음”이라고 즐거워했다. 하지만 키드먼의 숙소 입구에서는 파파라치들이 “키드먼의 새로운 스웨덴 연인”이라는 기사를 터뜨리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짧은 촬영은 긴 후반작업으로 이어졌다. <도그빌>의 포스트 프로덕션에는 9개월이 소요됐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배리 린든>에 대한 열광을 여러 차례 피력한 바 있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도그빌>의 음악으로 당대의 악기로 연주한 비발디를 비롯한 바로크 음악을 선곡했고 <배리 린든> 스타일의 점잖지만 어딘가 빈정거림이 묻어나는 내레이션을 깔았다.

Chapter 4 : 에필로그

2003년 5월 칸영화제. 니콜 키드먼은 러닝타임 178분으로 완성된 <도그빌>이 상영되는 도중 뤼미에르 극장의 좌석에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거대한 이미지와 음향으로 재현되는 자신의 수난극을 차마 견디기 힘들었던 탓이다. 이튿날 기자회견장에서 니콜 키드먼은 기자들에게 해명했다.

“솔직히 어젯밤 영화를 보고 있기가 힘겨웠어요. 스크린이 어찌나 거대한지. 게다가 그 사운드와 끔찍한 상황이라니. 앉아서 보다가 이건 너무 심하다라는 생각에 자리를 떴어요. 감독은 제 뒤에서 ‘그렇지만 곧 다시 돌아올 거죠?’ 이런 식이더군요.” 하지만 동석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그럼 어찌하면 좋았겠나, 상영을 멈출 수도 없는 일이고 하는 식으로 태평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한술 더 떠 기자들이 그득한 회견장에서 공개적으로 미국 삼부작의 2, 3편에서 계속 그레이스를 연기하겠다고 서약하라고 닦달하기도 했다. 기자회견장 밖에서는 이미 논객들이 거품을 물고 있었다. 당초 400만달러 선이었던 북미 배급권의 가격은 시사 뒤 600만달러로 치솟았다(7월23일치 <스크린 데일리>는 젠트로파 스튜디오가 니콜 키드먼의 바쁜 일정을 기다릴 수 없어 2, 3편의 그레이스 역에 새로운 배우를 캐스팅하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정리 김혜리 vermeer@hani.co.kr

■■ 이 기사는 덴마크 영화연구소가 발행한 <FILM>, <도그빌>의 프레스북, <LA 타임스>, <사이트 앤 사운드> 등의 관련 기사를 종합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1]

<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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