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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만든 그림자,야자와 아이의 <하현의 달>

1998년이니 <내 남자 친구 이야기>의 연재가 끝날 즈음이다. 일본의 한 잡지에 야자와 아이로서는 매우 놀랍게도 ‘시리어스한 미스터리’라는 카피로 <하현의 달>(下弦の月)에 대한 예고가 나왔다. 귀엽고 발랄한 여자아이들의 웃음과 꿈을 줄곧 그려온, 말하자면 인생의 가장 밝은 부분을 (실체감 있는 한에서) 최대한 화려하게 그려온 만화가로서는 놀라운 도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뒤 그녀의 외도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기다려왔지만, 후속작 <나나> <파라다이스 키스>가 한참이나 진행되고도 이 작품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두어번 해적판이 나와 속아서 이야기할 뻔도 했다. 그러나 6년을 기다린 뒤, 뒤늦게나마 정식으로 국내에 번역되었고, 이제 야자와가 말하는 ‘심각함’의 실체를 이야기해볼 수 있게 되었다.

고등학생인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이름은 미즈키. 그녀는 새어머니가 데리고 온 동생이, 이미 그녀의 친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낳은 자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동생은 어머니를 빼앗길까봐 못된 짓을 해댔고, 미즈키는 집을 나와 방황했다. 길거리에서 애절한 선율을 연주하는 백인 남자를 만났고, 그의 집으로 따라들어갔다. 뮤지션인 아담은 죽어버린 옛 애인과 닮은 미즈키에게 집착했고, 미즈키는 그에게 자기를 데려가달라고 했다. 그들이 만나기로 했던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미즈키는 차에 치어 죽어버렸다. 그리고 그 유령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어느 집에 갇혀버렸다. 이제 다른 소녀가 나타난다. 초등학생인 호타루는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으려다 빈집에서 피아노를 치는 아름다운 유령을 만난다. 유령은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며 단지 ‘아담을 만나고 싶다’는 감정만을 가지고 있다. 호타루와 친구들은 그녀를 ‘이브’라 이름짓고 그 바람을 들어주고자 한다.

사랑하는 연인의 연속된 죽음, 연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 때문에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유령, 초등학생의 나이에 유령의 애절한 사연을 들어야 하는 오컬트 체험…. 그 설정으로는 분명히 미스터리하고 시리어스하다. 그러나 야자와의 만화에서 애초에 뼈를 저미는 심각함과 비애를 맛보길 바랐던 것은 좀 과한 기대였던 것 같다. 한장한장 넘기기가 피를 빨리듯 괴로운 구스모토 마키의 <치사량 도리스>와 같은 분위기를 기대했던 마음은 쉽게 정리해야 했다. 그러나 실망이라는 말을 던지는 것은 아니다. <하현의 달>은 야자와 아이다운 ‘슬픔과 위로’의 만화다.

이 작품을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네명의 영특하고 개성있는 초등학생들이 한 유령의 사연을 해결해주는 오컬트 미스터리 탐정만화라고 할 수도 있다. 미즈키의 유령을 처음으로 바라보고 그녀의 친구가 되어준 따뜻한 마음의 호타루, 똑똑하고 독립적인 척하는 이벤트주의자 사에, 멍청한 듯 천진하지만 그만큼 쾌활한 테츠야, 가장 이성적이고 당연히 “유령 같은 게 있을 리 없잖아”라며 말하지만 직접 유령의 존재를 본 뒤에는 문제의 해결에 가장 시원시원하게 앞장서는 마사키…. 이들은 소년소녀 탐정단의 멤버로서 손색이 없는 구성을 하고 있다. 사실 클램프(CLAMP) 등의 초등학생용 탐정서클만화에 비교해볼 때도 캐릭터의 명료한 성격과 흥미로운 사건의 전개면에서 더 ‘제대로’다 싶은 면도 없지 않다.

물론 야자와는 죽음과 연애에 얽힌 뼈아픈 감정과 눈물의 장면을 미려한 필체로 정교하게 그려나간다. 그녀는 <내 남자 친구 이야기>의 5, 6등신에서 <나나> <파라다이스 키스>의 8, 9등신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이 작품을 그렸는데, 스스로 변화시키고 있던 인물과 연출의 기법으로 지독히 심각한 사랑을 그려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탐정단의 명랑한 분위기와 잦은 개그 터치는 전반적인 애(哀)와 희(喜)의 기조를 <나나> 이상으로 넘어서게 하지는 않는다(<나나> 역시 꽤 심각한 면이 많은 만화다). “오래간만에, 심각한 것을 그리고 싶어서 그리고 싶어서 그리고 싶어서… 드디어 폭발해버렸습니다”라는 고백은 ‘심각한 주제’와 그것에 접근하는 만화가의 ‘덜 심각한 태도’ 양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심각함에 대한 기대는 채우지 못하더라도, <하현의 달>은 충분히 흥미진진한 호기심을 가지고 들여다볼 만한 만화다. 이브가 왜 사야카라는 낯선 여자의 집에 갇혀 있을까? 그녀 손에 끼어져 있던 반지의 이니셜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아담이 쉼없이 부르는 <라스트 쿼터>(Last Quater)라는 곡은 어떻게 그들의 사연을 이어줄 것인가? 그리고 혹시 정말로 굉장하고도 뼈저린 결말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이명석/ 사탕발림 운영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