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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선은 없다, 절대악도
2001-05-16

김봉석 칼럼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에는 섬뜩함이 있다.

그가 그려내는 현실은 지나치게 예리하다. 그걸 보고 있으면 내 살점 어딘가가, 혹은 가슴 한구석이 베어져나가는 듯한 서늘함이 느껴진다. 막막해진다.

‘강령’이라도 되어, 내 안에 다른 영혼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처럼.

<큐어>에서 살인자의 희생물이 되는 시골 부부는 단 한번의 싸움도 하지 않은 잉꼬부부였다. 어린 시절부터 속속들이 서로를 알고 있는

부부이기 이전에 친구. 하지만 살인자의 ‘사술’에 걸려들어, 남편은 아내를 죽인다.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어떤 악의 그림자, 혹은 잿더미

같은 것들이 되살아나서. 그걸 보고 있자니, 너무 많은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전주영화제에서 상영한 <강령>을 보니, 그 순간이 또 떠올랐다. 너무나 착한 부부는, 한순간의 욕망 때문에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그걸 잘못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강령의 힘을 가진 아내는, 그 ‘기프트’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조차 힘들다. 그 ‘기프트’를 이용하면 혹시

유명해지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순간 그들의 발목은 수렁 속에 박혀버렸다. 그리고 허물어져 내린다. 그간 그들이 쌓아올린 아주 초라한 것들까지도

모두. 그들의 절망적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숨이 막혔다.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그걸 물어본 이유는, 그 사적인 느낌 때문이었다. 그렇게 지독하게, ‘착한 사람들’의 전락을 집요하게 파고든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게 현실이라고 생각하나요?” 그의 대답은 예상을 초월했다. 내 예상은, ‘그게 현실이다’ 정도였다. 하지만 구로사와 기요시는 더

대담했다. 그리고 정확했다. “누구나 선한 면과 악한 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게 현실이다.” 맞다. 옳은 지적이다. 그들 역시 선하고,

악한 보통 사람들이다. 착하기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악한 면이 그들을 이끈 것이다. 그걸 잊었다. 어디에도 절대선은 없다,

절대악도.

착하기 때문에 고통받는다는 생각은, 무의식적으로 희생을 신성시하게 된다. 희생자인 그들은 선하다. 선하기 때문에 그들은 고통받는다. 그들은

현대의 희생양이다. 그리고 은근슬쩍 자신을 끼워넣는다. 그러니까 살아남으려면 악해져야 한다고. 나는 착한 사람이지만 악해져야 한다고.

나는 구로사와 기요시를 두번 만났다. 올 초 눈이 내리는 신주쿠에서 한번, 그리고 이번 전주영화제에 초청돼왔다가 서울에 잠시 들렀을 때 다시

한번. 간극은 길지 않았다. 어쩐지 나는, 두 만남이 한자리에서의 일인 것처럼 기억된다. 신주쿠에서 구로사와 기요시는 “사람들은 죽음이 곁에

있다는 걸 잊고 살아간다”고 말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그가 그토록 ‘현실’에 집착하면서, ‘호러’에 경도되는 이유를 들었다. 구원이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회로>의 마지막, 살아남기 위해 배에 탄 그들은 어디로 갈까.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처럼 그들은, 우리는 영원히

떠돌아야 하는 ‘주술’에 걸린 존재가 아닐까. 음… 돌아가서 R.E.M.의 <Losing My Religion>이나 들어야겠다.lotu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