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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로 돌아온 TV 드라마의 중견배우 4인 [2]

무기력하게, 무표정하게 하지만 창자를 끊을 듯한 열정으로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부터 <바람난 가족>까지, 배우 김인문

I’m Back_ 다작배우의 뒤늦은 발견

술 한잔 걸친 늦은 귀가였다. 무심코 TV를 튼 김인문씨는 우연히 <처녀들의 저녁식사>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거, 감독이 보통놈이 아닐세.” 이후 <바람난 가족> 시나리오를 읽은 그는 “이렇게 뻔뻔한 시나리오를 쓴 사람, 얼굴이나 보자”는 마음으로 한번 뵙자는 임상수 감독의 제안에 흥쾌히 응했고 “인간성은 전혀 마음에 안 들지만 연출력은 인정되는” 감독에게 “이왕 하는 김에 진짜 솔직하고 노골적으로 해보자”는 OK 사인을 건넸다. “선생님께서, 이런 ‘위선의 시대’에 요런 작품은 반드시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웃음) 물론 임상수 감독에게도 조건은 있었다. “늘 감초 같은 역할만 하셨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레고리 펙처럼 해달라고 했죠, 잠시 나와도 제일 멋있고, 위엄있고, 폼나게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하이톤의 쇳소리 ‘이장님 목소리’는 안 쓴다는 것을 주원칙으로 삼았다. “얼마 전 제 친구 중에 하나가 완성된 영화를 보더니, 김인문 선생은 조폭 두목 시켜도 될 만큼 카리스마가 느껴진다고 하던데요. 저로서는 배우의 발견이죠.”

사실 김인문씨는 최근 <조폭 마누라> <엽기적인 그녀> 등 웬만한 최근 히트작에서는 빠지지 않고 얼굴을 볼 수 있는 ‘다작배우’다. 물론 구멍난 독에 물을 가득 채워보라는 선문답을 던지던 <달마야 놀자>에서도, 귀여운 대통령으로 출연했던 <재밌는 영화>에서도, 똥지게를 진 무능한 아버지였던 <해적, 디스코왕 되다>에서도, “개 같은 년” 같은 쌍욕도 서슴지 않고 내뱉는 늙은 ‘운짱’으로 등장했던 <철없는 아내,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에서도 그는 늘 같은 모습을 반복 재생산하진 않았다. 하지만 <바람난 가족>에서 그는 확연히 다르다. 목소리를 낮추고, 표정을 줄인 채 죽음을 담대하게 받아들이는 이 이상한 아버지는 짧게 등장하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특히 죽기 직전 병상에서 부르는 <김일성찬가>는 묘한 공명을 가진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일본군가>였던 것을 <김일성찬가>로 바꿔 부르면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은 김인문씨였다. “이북 출신 영감이잖아요. 단지 이념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 어릴 적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불렀을 노랠 텐데, 죽어가면서 아마도 본능으로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서, 그래서 부른 거야. ” 인터뷰 도중 갑자기 그가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 나른한 오후, 호텔로비의 공기가 그의 노래로 조용히 덮인다.

Once upon a time_ ‘스타’다방에서 배우를 시작하다

농대를 졸업한 이 ‘흙의 사나이’는 26살 무렵 그 어렵다는 공무원 시험에 떡하니 붙어서 “흰칼라 입은 멀끔한” 동사무소 재무담당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때가 자유당 말기라서 비리가 많을 때예요. 점심 먹고 와보면 책상 아래 와이루(뇌물)가 놓여 있더란 말이지. 그런데 그 돈이 다 자기들 잘되려고 주는 거 아니겠어, 결국엔 내 인생의 흡집이 나는 게 싫어서 2년8개월 만에 때려치웠지 뭐.” 무얼 할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배우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스쳤고 그때부터 김수용 감독 집 앞에서 오로지 배우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죽치고 서 있었다. 김 감독의 부인은 “고생하지 말고 연락처만 남겨놓고 가라”고 타일렀지만 이십대 후반의 이 피끓는 청춘의 의지는 길바닥에서 밤을 새우는 날이 늘어갈수록 더욱 가열차게 타올랐다. 공무원 그만둔 게 쪽팔려서라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름이면 모기에 수혈을 하는 와중에도 적십자에 가서 피뽑아 매혈하고, 겨울에는 천호동 벽돌공장에서 벽돌을 구우면서 추위를 피했다.

<푸른하늘 은하수>

<감자>

<달마야 놀자>

그렇게 13개월, 1년이 넘게 김 감독의 집 앞을 지키던 어느 날, 부인이 “들어와보라”는 말을 그에게 건넸다. “들어가니 김수용 감독이 다짜고짜 “이 사람이 말야! 배우 아무나 되는 건 줄 알아?”하고 호통을 치시더라고. 그런데 신이 도왔는지, 그 말에 주눅이 든 게 아니라 뜬금없이 “‘혹시 스타니슬랍스키의 배우론을 아십니까?’라는 말이 쑥 나와버렸던 거지.” 그렇게 대성하는 배우는 길 지나가도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어야 한다. 좋은 배우가 되고 안 되고는 상상력의 차이다. 앤서니 퀸, 더스틴 호프먼을 봐라, 절대로 미남 아니다. 뭐 이런 말을 쉬지 않고 지껄였다. “그제서야, 너 이리 앉아봐라. 하시더라고. 그래서 내가 테이블 위에 도민증하고 공무원증을 딱 올려놨지. 신분도 확실한 거지. (웃음) 그리고 찬찬히 보시더만, 내일 새벽 5시에 스타다방으로 나와, 그러대. 다음날 가보니 여기저기 유명한 배우들이 앉아 있더라고, 아이고 어머니, 나 배우 다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그때 조감독이 설렁탕 먹고 촬영가자 그러더라고, 그때는 잘 먹으면 하루에 가락국수 두 그릇이었는데 설렁탕이라니, 식당에 앉아서 첫 숟갈을 뜨는 순간, 그 열세달간의 아니 이십몇년간의 뭔가가 울컥하니 올라오는 게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거야….”

어떻게 얻은 배우라는 타이틀이었던가. 뙤약볕에서 하루종일 기다려도, 대사가 없어도 신나고 좋기만 했다. 그렇게 7, 8개월 동안 엑스트라를 거친 그에게 신영균, 윤정희 주연의 <맨발의 영광>에서 6신이나 등장하는 깡패 역할은 본격적인 배우인생의 시작이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성공하겠다던 열살배기 소년의 꿈도, 멀리 솟은 삼각산을 우러러보며 대성하겠다고 다짐하던 청년의 희망도 대사 한마디의 희열 속에 다 녹아버렸다.

Show must go on_ 더 늙기 전에, 죽기 전에

“내보고 염밭에 가서 일을 하자구? 굶어 죽었으면 죽었지 못혀!” 마누라 덕에 겨우 밥을 먹으면서도 체면은 차리는 <감자>의 무능력한 소금골 서 서방을 비롯해, “가진 건 쥐뿔도 없는데 달랑 하나 있는 것도 제구실을 못하는” 천덕꾸러기 남편으로 등장한 <수탉>까지, 꽤 오랫동안 그는 무력한 남자의 초상이었다. 호방하게 계집 한번 후리지도 못하고 구들장에 누웠다가 밥상이나 받는 아버지, 세상사의 흐름에서 조금 비껴나간 듯한 장돌뱅이 같은 의 주인공들 역시 한참 동안 그의 차지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엔 늘 이면을 비출 거울들이 순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노식 선생이 나를 보고, 넌 악역을 해야 해, 그러시더라고, 악역이란 게 인상 더럽다고 하는 게 아니다, 칼로 푹 쑤시고 무표정하게 돌아서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걸어가도 하나도 안 이상할 사람이 진짜 악역이라고. 글쎄, 더 늙기 전에 정말 제대로 된 악역도 해보고도 싶어. 그런데 배우란 늘 선택이 되어야 하는 존재잖아. 그러니 어떡해, 늙어죽을 때까지 선택받게끔 노력하는 수밖에, 난 한번도 떠본 적도, 떨어져본 적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오히려 꾸준히 할 수 있는 거지.”

그가 최근 염두에 두고 있는 작품은 바로 여균동 감독의 <비단구두>다. 북한땅을 밟는 게 소원인 노인에게 아들이 강원도 어느 마을에 고향동네를 똑같이 재현시켜준다는 이 판타지에 가까운 영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의 속에서는 훅하고 뭔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배우는 늘 한이 많아. 해놓고 나면 늘 후회한다고. 그런데 창자로, 이 배창자에서 끌어올려서 연기를 하고 나면 정말 만족감을 느끼거든. 그게 진짜야. 진짜 연기.” 죽을 날 앞둔 노인이 <오빠생각>을 흥얼거리며 비단구두를 새끼줄에 덜렁덜렁 매달고 걸어가는 마지막 그림을 떠올리기만 해도 “이건 정말 내가 죽기 전에 한번 해보고 싶은 역할”이라며 아이처럼 들떠하는 배우. 그래, 그 기다림의 시간이 13개월인들, 13년인들, 130년인들 어떠랴. 어차피 그에게 연기란 건 배창자가 끊어지는 순간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될, 기다려 내지 않으면 안 될 숙명이 아니었던가. 글 백은하 lucie@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필 모 그 라 피 (Filmopraphy)

1939년생

영화 <맨발의 영광>(1968) <감자>(1987) <수탉>(1990) <휘모리>(1994) <엽기적인 그녀>(2001) <달마야 놀자>(2001) <해적, 디스코왕 되다>(2002) <바람난 가족> (2003) <영어완전정복>(2003) 외 다수

TV <순심이>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옥이이모> <저 푸른 초원 위에>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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