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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싱글즈>를 보고 여성 판타지의 종합선물세트를 느끼다
강유원(철학박사) 2003-07-24

나는 종종 여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청맹’ 상태에 빠진다. <질투는 나의 힘>을 봤을 때도 그랬다. 여자감독이 만든 이 영화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여자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쓸데없이 알고 있는 듯한 투로 말을 꺼냈다. 화근이었다.

“남자 둘을 번갈아가면서 만나고, 그 남자 둘이 화기애애하게 지내는 거 보고 있는 여자는 여왕벌 아니냐? 자궁에서 남자들을 화해시키려는 엄청난 여신적인 욕망 아니냐?”

어떻게 그런 한심한 소감을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느냐는 투의 대답이 돌아왔다.

“형, 그렇게 본 건 X가 X만 봤기 때문이에요. 그 영화는 그냥 남자들의 뻔뻔스러움에 대한 영화예요. 수컷들은 어떤 경우든 거들먹거린다는 거, 박해일처럼 거들먹거리지 않는 시늉을 취하는 경우도 사실은 ‘나는 안 거들먹거려’라고 거들먹거린다는 거, 남자 둘이 화해하는 건 그 둘이 여자를 대하는 태도는 궁극적으로 같다는 거예요.”

나는 목간에서 미끄러진 것처럼 민망했지만 반박할 수 없는 명쾌함에 눌려서 후배가 읊어준 도식으로 그 영화를 재조립해서 봤다. 군더더기 없이 잘 들어맞았다. 그 순간 참 섬뜩했다. 이 여자감독 참 독종이구나! 어떻게 패밀리의 일급비밀을 그렇게 야담과 실화 수준으로 술술 읽어치울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한숨 돌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박찬옥 감독이 섬뜩한 게 아니라 내가 한심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이 쉬운 영화를 갖고 헤맨 이유는 설마 남자를 그런 식으로 볼까 하는 평소의 어떤 몸가짐 때문에 눈에 백태가 끼었기 때문일 터였고, 그런 태도는 세상 여자들이 다 알면서 말하지 않는 것을 저 홀로 패밀리의 일급비밀로 생각하는 코미디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싱글즈>는 두 여자주인공이 하는 얘기가 너무 잘 들려서 오히려 내 귀가 의심스러웠다. 동미가 말한다. “나 동거해도 섹스없이 할 수 있어. 같이 김치 담그면서. 너희는 동거하면 섹스 생각하고 하지. 난 섹스할 땐 따로 불러와서 해. 그리고 그거 옆에서 다 구경한 남자가 내 애 아버지야. 싫다면 나 혼자서 기르는 거고.” 나는 동미를 어디선가 본 듯하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호정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런데, 그보다 전에 나는 이 여자들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맞다! 20대 때 내 머릿속에서 무수히 그렸다가 지운 여자들이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자러 왔다가 떠날 때는 말없이 흔적없이 떠나는 여자.

저 홀로 주체적이면서 남자의 욕망과 딱 맞는 여자. 그래서 누이 좋고 매부 좋지만 실상은 남성의 부정형은 될 수 있어도 여성의 긍정형은 될 수 없는 여자. 나는 처음에 동미를 그렇게 봤다. 그런데, 나난이 동미의 아버지 노릇을 해주겠다고 연대감을 표시하는 대목에서 동미의 위치는 달라진다. 나난은 일과 사랑을 적당히 조화하려는 흔한 현실 속의 캐릭터다. 다시 말해 동미에 대한 대다수 여성의 지지를 대변할 수 있는 인물이다. 정준이란 남자캐릭터는 어떤가. 동미가 마흔명이 넘는 남자를 데려와 자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이 남자조차 동미를 문제없이 받아들일 태세다. 그래서 동미는 사실상 남성의 부정형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여성의 긍정형으로서 승인받는다. 그러니까 동미는 여성들이 속에서 거침없이 하고 싶은 얘기를 가래침 뱉듯 하고서도 여성은 물론 남성에게서까지 박수를 받는다. 참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게 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잠시 스트레스 푸는 여성 판타지의 종합선물세트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정준이란 청년, 극중에서도 등신 소리 여러 번 듣지만 등신 맞다. 그런데 너무 대단한 등신이다. 어찌보면 등신의 탈을 쓴 자상한 가부장 같다. 나난의 애인도 마찬가지다. 세련된 왕자풍이 아니라 느끼하고 촌스러운 뚝심으로 교묘히 덮었지만 아무래도 아버지 같다. 이 사람들을 아버지로 보는 것 자체가 남성적 욕망의 투사일 수 있다. 어쩌면 이 사람들은 여성들의 굿판에 동원된 완전한 들러리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나는 이 영화가 여성들끼리의 독백 같다. 이런 독백이 정치적으로 유용한지는 잘 모르겠다. 정준과 동미의 동거는 그것이 아무리 판타지라도 간혹 용맹무쌍한 추종자를 만들 것이고, 그런 뜻밖의 사건에 역사는 더러 신세진다. <싱글즈>에는 그런 대목이 꽤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나는 판타지를 삶의 양식으로 삼을 수도 있는 29살 싱글즈보다 빼도 박도 어려운 39살 더블즈가 무슨 말을 할지 그게 더 궁금하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