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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영화제 화제뿌린 <도그빌> 8월 1일 개봉
2003-07-24

인간은 착하지 않아, 세상이 싫다

올해 칸영화제에서 많은 화제를 뿌렸던 덴마크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도그빌>이 8월 1일일 개봉한다. 칸에서 상은 못 받았지만, 이 영화는 경쟁작들 가운데 두세 손가락 안에 들 만큼 평단의 찬사를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막상 영화를 보면, 라스 폰 트리에는 영화 형식의 실험은 꾸준히 하지만 사람과 사회에 대한 탐구는 하지 않는 이 같다. 카메라를 마구 흔들면서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허물고(백치들), 끔찍한 현실과 대비되는 판타지를 수려한 뮤지컬에 담아 현실장면 속에 느닷없이 삽입시킨(어둠 속의 댄서), 기발하고 현란한 실험을 거둬놓고 보면, 두서를 잃은 부조리극(백치들)이거나 작위성 짙은 신파(어둠…)였다. 이 기획력 강한 감독은 장애인, 모성애 같이 쉽게 무시하기 힘든 요소를 집어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좋게 말하면, 특히 <어둠…>의 경우 오래 전부터 익숙하게 보아온 이야기에 이런 실험을 곁들여 쿨한 현대의 관객들이 눈물 흘리게 만드는 건 분명 흔치 않은 재주다.

<도그빌>은 <어둠…>처럼 눈물을 요구하는 감동의 드라마가 아니다. 어떤 사연을 가지고 도망다니는 여주인공 그레이스(니콜 키드먼)가 ‘도그빌’이라는 산골의 작은 마을에 들어온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숨겨주기로 결정하고, 그레이스는 그 대가로 집집을 찾아다니며 잡일을 거든다. 그러나 그레이스의 수배 전단이 붙고, 그녀를 범죄자로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집단 학대한다. 목에 쇠사슬을 채워놓고 하루종일 부려먹고, 남자들은 밤마다 돌아가며 그녀를 범한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어둠…>의 여주인공처럼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 마을사람들과 똑같이 잔인하게 복수를 시작한다. “기쁨과 함께 슬픔도 같이 포함하고 있는 살아있는 영화”라는 라스 폰 트리에의 말을 염두에 두면, 그는 이 기묘한 이야기가 끔찍하면서도 슬픈 우화가 되기를 의도한 듯하다.

그 의도대로라면 이렇게 변형해 요약할 수 있다.(주의: 영화 결말을 미리 알게 될 수도 있으니, 그게 싫은 분은 이 문단은 건너 뛰시길.) 악마에게서 요정이 태어났다. 악마에겐 나름의 질서와 권력이 있지만, 요정은 그게 싫어 속세로 도망나왔다. 가난한 인간들에게서 선한 의지를 찾고자 애쓰지만, 인간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인간들의 노예이자 창녀로 전락한 요정은 절망한다. 마침내 악마가 요정을 찾아왔을 때, 요정은 악마의 권력을 빌려 인간들을 응징한다. 눈물을 흘리면서.

정말 우화처럼 갔다면, 요정이 눈물 흘리는 결말이 슬플 수 있었을지 모른다.(니콜 키드먼만큼은 요정처럼 아름답다.) 영화는 그레이스의 수난사를 사실적으로, 길게 재현한다. 거기에, 선의를 가장한 남자들의 욕정, 아름다운 이방인에 대한 여자들의 견제심, 악행의 집단화를 통해 죄의식에서 달아나려는 심리 등등 다른 영화나 소설에서 자주 쓰여 클리셰가 되다시피한, 인간의 사악함을 드러내는 장치들을 총동원한다. 관념적이고 새롭지 않다. 마을 사람을 악인으로 내모는, 그 일방통행 길엔 연민이나 절망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서 비극성이 떨어진다.

영화를 받치는 중요한 한 축은 라스 폰 트리에의 복병, 새로운 형식이 등장한다. 큰 창고의 바닥에 흰 선으로 구획을 나눠, 엘름거리, 톰의 집, 진저의 가게라고 한 귀퉁이에 써놓았다. 집들의 담을 세우지 않고 탁상, 침대 등 몇몇 가구들만 배치했다. 소꼽놀이판을 크게 뻥튀겨 놓은 듯한 이 무대가 2시간 58분짜리 영화 전체의 배경이다. 어느 한 집을 비추어도 그 뒤의 거리와 건너편 집, 그 안의 사람이 보인다. 아파트 벽이 완전히 투명해서 가구마다 사람들이 다 보인다면 그 풍경이 어떨까. 많은 아이러니컬한 이미지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풀숏으로 비추는 건 이럴 때다. 어떤 집에선 과일 깍고, 어떤 집은 잡담하고 하는 저 뒤편의 한 집에서 그레이스가 강간당하고 있다. 그 꽉 짜인 의도의 상투성이 답답하다. 그래도 거대한 연극 무대를 꾸며놓고 카메라가 오가며 이야기를 중계하는 영화의 형식은 분명히 신선하다.

하지만 인물들에 대한 탐구심 없이, 이야기를 위해 인물들을 배치하는 모습은 보기 좋지가 않다. 이 감독이 세상을 좋게 보는 이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악의, 오해, 무관심 같은, 해결해야 할 인간 사이의 모순들을 어쩔 수 없는 조건으로 쉽게 기정사실화하고는, 이야기를 이어가는 장치로 활용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에, 인간이나 사회에 대한 새로운 관찰이 없다면 허망하지 않을까. 임범 기자 is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