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쾌한 영화랬는데‥펑펑 울었어요"
가운데 손가락에 조잡한 ‘왕’자 문신을 새겨넣고, 압구정동에 있다는 로데 ‘오’거리에 원두커피전문점을 차리는 게 꿈인 아가씨. 영화 <똥개>(곽경택 감독) 속 정애는 처음 보여주는 겉모습보다는 속이 훨씬 깊은 애다. 수돗가에 있는 철민(정우성)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게 된 날이다. 버림받는 걸 확인하게 될까 두렵던 그 순간을 진한 사투리로 정애는 무심하게 이야기한다. “감독님이 경쾌한 영화니까 눈물은 그냥 담고 있는 정도만 하라 했거든요. 근데 처음엔 정말 펑펑 울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엄지원(25)은 정애에 푹 빠져 있었다. 아침드라마 한편과 <오버 더 레인보우>의 작은 역할 정도가 전부였다가 “거친 캐릭터를 해보고 싶어서” 3차까지 오디션을 치르며 따낸 역이었다. 자전거도 못 타던 엄씨는 몇주간 집중적인 연습과 부상 끝에 밀양의 좁은 골목을 철민과 누비며 영화의 ‘최대 추격신’을 해내기도 했다. “처음엔 세상 거칠게 산 불량소녀라고만 생각했는데 갈수록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졌어요.”
영화에서 느껴지지만, 엄지원은 나오는 장면마다 얼굴이 달라 보이는 배우다. 야한 화장의 다방 배달아가씨가, 맨얼굴로 똥개와 뒹굴며 텔레비전 보는 소도시 청춘의 느낌이 다른 맛으로 살아난다. 시나리오에 그냥 띄어쓰기 없이 쓰여 있던 로데오거리를 엄씨는 대사연습부터 자연스레 로데 ‘오’거리라 읽었다 한다. “한번도 태어나 서울에 가본 적 없는 애잖아요. 그냥 천안 삼거리처럼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관객들에게 큰 웃음을 안겨주면서도, 정애라는 애의 삶을 대사 한마디로 그려 보인 셈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20살까지 살아온 덕인지 영화 속 엄씨의 사투리 연기는 그 누구보다 자연스럽다. 본인은 “부산쪽이랑 사투리가 달라서, 나중엔 우성오빠가 ‘니 좀 이상하다’라며 가르쳐주기까지 했어요”라고 겸손해하지만. 정작 어려운 건 철민(정우성)과 미묘한 연애감정을 잡아나가는 것이었다. 정애는 또 영화에서 똥개와 똥개 아버지(김갑수)를 바라보는 관찰자다. 세상 밑바닥을 혼자 힘으로 살아온 정애의 눈에 애증이 오가는 철민 부자는 부러운 존재인 한편, 철없는 한국 남성들은 한심하면서도 연민스런 존재다.
발랄해보이기만 하는 엄지원에게 이런 미묘한 감정과 투박한 정서의 영화가 힘들진 않았을까. 하지만 우연히 서울의 언니에게 놀러왔다가 거리에서 캐스팅돼 오락프로그램의 코너 진행자로 데뷔한 그는 자신을 “아날로그적 인간”이라 잘라 말한다. 연기자의 삶은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고. 신문사 한 구석에 쌓여 있던 만화책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며 금세 퍼질러 앉아 먼지를 탁탁 털어가며 책장을 넘긴다. “컴퓨터로 클릭하는 것보단 이렇게 책장을 넘기는 게 좋아요.” 그러면서도 “굿은 많지만 베스트는 하나다”란 말을 되새기며 베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밝히길 서슴지 않았다. 당차면서도 야무진 게 역시 정애다. 글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