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적한 멀티플렉스를 버리고, 굳이 변두리 예술영화관을 찾아가 다큐멘터리영화를 감상하는 ‘일반’ 영화관객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지. 맛깔스런 TV쇼와 최신 영화 메뉴가 준비된 유료 <HBO> 채널에서 다큐멘터리를 선택하는 미국인이 얼마나 될까, 라는 질문에 의기소침했을 다큐멘터리 작가들은 아마 이번 여름, 예상치도 않았던 다큐멘터리의 흥행담에 신바람이 날 것이다.
<LA타임스>에 따르면 여름 시즌, 예술영화관 히트작 4편 중 3편이 다큐멘터리라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발생했다. 500만달러의 흥행수입을 올린 자크 페랭 감독의 <철새 이주>를 필두로, 올해 아카데미상 후보작이었던 제프 블리츠 감독의 <스펠바운드>, 섹스 범죄 스캔들에 말려든 롱아일랜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앤드루 제러키 감독의 <프리드만 가족 따라잡기> 등이 다큐멘터리 부흥의 주역들.
이 때아닌 부흥에 마이클 무어의 아카데미 수상작, <볼링 포 콜럼바인>(사진)의 흥행 대성공이 한몫 톡톡히 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한편으로는 세련된 영상과 특수효과로 무장한 블록버스터들이 채우지 못한 갈증도 주원인으로 꼽힌다. 재미와 감동이 섞인 정통 드라마를 할리우드가 외면하는 가운데, 눈길 끄는 소재면 어디든 달려가는 신세대 다큐멘터리 작가들이 장르영화 문법이건 MTV적 영상이건 가리지 않고 양념을 쳐서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진짜’ 이야기들을 쏟아내는 까닭이다.
미국 각지의 대표선수들이 모여 서든 데스의 대접전을 벌이는 ‘전미 스펠링 경연대회’(National Spelling Bee)도 USC 필름 스쿨을 갓 졸업한 제프 블리츠 감독의 손에서 스릴 넘치고 감동어린 드라마로 태어났다. 공부벌레라 조롱받기 일쑤인 참가자들은 알고 보니, 영어 한마디 못하는 멕시코 불법체류 노동자 부모를 둔 텍사스 소녀이거나 전문 트레이너까지 고용한 중산층 인도계 소년 등 사연도 가지각색. <스펠바운드>는 이민 1세대 부모를 대신하여 ‘완벽하게’ 미국사회에 정착하려는 공부벌레들의 지난한 아메리칸 드림 구현 과정을 손에 땀을 쥐고 관람하게 한다. 사회운동의 도구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온 선배들이 보기에, 센세이셔널한 스토리와 화려한 스타일을 추종하는 이들 신세대 다큐멘터리는 지나치게 상업화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영방송 <PBS>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P.O.V>가 전세계의 충격적인 인생 역정들 속에서 글로벌 이슈를 논의하는 작품들로 새 시즌을 확대 개편한 데서도 볼 수 있듯, 선정적이나마 생생한 세상살이 이야기가 관객의 눈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할리우드도 이에 질세라 올리버 스톤, 마틴 스코시즈, 마돈나까지 합세하여 다큐멘터리 작업이 한창이라니 픽션보다 더욱 드라마틱한 인간 극장들이 과연 내년 봄도 점령할 수 있을지 사뭇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