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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사토시의 <소년 소녀>

소년은 전사가 아니고, 소녀는 천사가 아니야

만화에서 배우고 만화로 그리는 작가들이 있다. 그 만화들은 편안하고 익숙하다. 장르의 규칙 속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게 만든다. 반면에 인생에서 배우고 만화로 그리는 작가들이 있다. 그 만화들은 거칠고 낯설다. 우리를 만화 속에 빠뜨리지 않는다. 잠깐 적셨다가 인생으로 돌아가게 한다. 나는 어느 쪽이 좋다고 단정짓지 않는다. 다만 그 앞쪽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말한다. 후쿠시마 사토시의 단편 연작집 <소년 소녀>(북박스 펴냄)는 둘의 경계에 서 있다. 그리고 압도적이지 않은 쪽에 조금 기울어 있다.

<소년 소녀>는 여름방학과도 같은 만화다. 거친 연필선이 느껴지는 목차의 오프닝에서부터 분명하다. 여름 어느 날 자전거를 탄 소년들이 버려진 저택을 찾아온다. 가위바위보를 하고 서로의 등을 떠밀며 안으로 들어간다. 깨진 창으로 무성하게 자라난 나무, 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인 정체불명의 엔진, 인체의 해부도를 보여주는 책, 그리고 나부(裸婦)의 그림 뒤로 슬며시 열려 있는 비밀의 문. 여름날의 백일몽 같은, 사실인지 꿈인지조차 분명히 잡히지 않는, 그러나 남은 인생의 밑바닥에 단단하게 맺히게 되는 이야기들이 그 안에서 펼쳐진다.

여러 단편들의 시간과 공간은 다르다. 하지만 분명히 우울하고 심각한 단어들로 정리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린 날의 우발적인 살인, 전쟁에서 서로 다른 편에 선 가족, 변태적인 아르바이트 매춘, 출장길에서의 뜻하지 않은 죽음, 가출 자전거 소년…. 그런데도 그 이야기는 전혀 우중충하지 않다. 반대로 화사한 해피엔딩의 빛을 함부로 내보이지도 않는다. 서투른 자전거처럼 양쪽으로 비틀거리지만, 자기가 가야할 길을 간다.

책의 제목처럼 주인공들은 소년과 소녀다. 실수로 또래의 남자아이를 우물에 빠뜨려 죽인 소녀와 그 남자애의 동생이다. 마흔이 넘도록 여자친구도 없이 헌 자동차로 발명품을 만드는 만년 소년과 그의 곁에서 소녀 시절의 전부를 보내고 멀리 결혼의 길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이혼녀다. 전쟁의 뒤안길에서 전차를 사이에 두고, 남자다움의 어리석음과 여자다움의 부끄러움을 나누는 소년과 소녀다. 이들의 인생에 사소한, 또는 무거운 비극들이 찾아온다. 회피하고 모른 척하고 타협할 수도 있지만, 소년과 소녀들은 당당하게 맞선다. 잘못이 있다면 평생 이 짐을 짊어지고 가겠다고, 너만은 내가 지키겠다고 말한다. 스스로 부끄러 낯이 빨개지지만, 용감하게 말하고 만다. 말할 수 없을 때는 무조건 앞으로 내달려라도 본다.

숱한 비극과 상실의 순간들이 닥친다. 왜 우리 인생은 이따위일까, 그리고 왜 굳이 만화에서까지 이런 장면들을 만나야 할까, 당신은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로니컬한 유머로 잘 짜여진 상황과 낯뜨겁지만 절묘한 대사들이 그 긴장을 절묘하게 연소시킨다. 형인 지로를 죽인 초등학생 요시코가 지로의 동생 고로를 학교 뒤로 데리고 간다.

뭐 하는 거야?/ 보면 모르겠어? 우리 애 만들자. 지로 대신은 안 되겠지만 보상하는 의미에서/ 그, 그만 둬. 나보다 연상이면서/ 애 어떻게 만드는지 알지. 이리 와서 팬티 벗겨! 너도 남자니까 리드해!/ 우리 집은 아직도 8형제야. 더 늘어나면 안 돼/ 내가 키우면 되잖아/ 우와 벗지마. 눈 썩는다/ 애 만드는 거 간단해. 서로 끼우면 되잖아(이때 철장 속의 토끼들이 귀를 쫑긋쫑긋)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참담하기까지 한 고교생 남녀의 자살 소동에서부터 우주 팬더가 등장하는 판타지적 장치까지 단편들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기조는 한 군데로 모여 있다. 남자아이가 자살을 실패한 전차에 커터칼을 휘두르는 소녀와 “우주 팬더, 3번째 소원은… 부탁이야, 사라져 줘”라고 말하는 소녀의 마음은 결국 같은 것이 아닐까? 세상의 비참은 존재하는 것이고, 싸우고 날뛰어봤자 해결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그 모든 건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만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소년이니까, 혹은 소녀이니까 더 오랫동안 이겨나가야 할 문제이지만, 소녀와 소년이니까 언젠가는 이겨볼 수도 있는 문제이다.

후쿠시마 사토시는 근래에 보기 드문 훌륭한 단편 작가다. 데생은 아직 서투르고 클로즈업에서 지나치게 생경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지만, 독특한 느낌의 스토리텔링은 분명한 재능을 보여준다. 그는 1990년 가을 <애프터눈> 사계상으로 데뷔했고, 이후 <모닝>을 중심으로 여러 단편을 게재한 뒤 2000년에는 <데이 드림 빌리버>(Day Dreambeliever)를 발표했다. 현재는 <코믹 빔>에 <소년 소녀>를, 고단샤의 온라인 만화 사이트 <이-망가>에 <G>를 연재하고 있다.이명석/ 사탕발림 운영 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