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프로듀서를 하면서 늘 바라는 것이 있다. 작품을 할 때마다 모든 스탭들과 친해지는 것이고, 그들과 다시 다른 작품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일이 그렇듯 쉽지는 않다. 어떤 이유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생기고, 말 못할 오해와 갈등이 빚어지기 일쑤다. 그럼에도 늘 꿈꾼다. 영화인생의 고락을 함께하는 스탭들과 살갑게 만나서 이번에는 좀더 잘해야지. 스탭들 중에서도 특별히 더 기대하고 만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연출부다. 그들은 영화의 맨 처음에서 출발하여 영화가 극장에 걸리기까지 영화사를 들락거리는 최후의 스탭들이다. 어쩌다 준비하던 영화가 엎어지게 되면, 1년 넘게 드나들던 영화사에서 아무런 항변도 못하고 소리없이 사라져야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음 영화를 선택하고, 처음부터 그 일을 다시 시작한다. 이유는 한 가지다. 감독이 되어야 한다는 꿈을 운명처럼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작은 소망 중 하나는 작품을 함께한 연출부가 감독으로 데뷔하는 것이며, 이왕이면 나와 함께 그 꿈을 이룰 수 있기를 늘 바란다.
올해로 서른두살이 된 감독지망생 조창호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춘천 촌놈이고, 서울예술대학 영화과를 졸업했다. 임순례 감독 <세친구>와 김기덕 감독의 <파란대문> 연출부를 했고, 변혁 감독의 <인터뷰>와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 조감독을 거쳤다. 어떻게든 단편영화 한편을 만들고 싶어서 촬영은 마쳤는데, 후반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당연히 돈이 모자라서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두세편의 시나리오를 나에게 가져왔다. 내가 그에게 던진 말은 “야, 조창호! 너 감독되기 싫으냐? 감독이 되고 싶으면, 이런 시나리오는 빨리 휴지통에 버리고 새로 재미있는 시나리오 좀 써봐라!” 그에게는 참으로 냉혹했을 것이다. 격려와 위로는커녕 단칼에 욕만 먹었으니. 그렇게 2년이란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가 버렸다. 그는 어딘가에 처박혀서 시나리오를 쓰고 또 썼을 것이다. 나는 한동안 연락을 잊어버렸고, 언젠가는 나타나리라 기다리며 무심한 시간만을 흘려보냈다.
지난주에 그가 느닷없이 찾아왔다. 그의 얼굴을 본 지 꼭 일년 만인 것 같다. 연출부 출신이 나를 찾아오는 경우는 딱 두 가지다. 술이 고프거나, 보여줄 시나리오가 있거나이다. 그가 술이 고팠으면 수도 없이 찾아왔을 테지만, 오랜만에 온 것은 필히 시나리오 한편을 완성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예상대로였다. 모 영화사에서 각색을 의뢰받았는데,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어서 감독까지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나의 무슨 얘기라도 듣고 싶어하는 그를 위해 단숨에 시나리오를 읽었다. 그리고 다음날 만나서 밤새도록 술을 펐다. 나는 그에게 처음으로 격려를 해줬다. 영화화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시나리오이며, 이렇게 저렇게 하면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비록 영화가 완성될 수 있을지는 나중 일이지만, 그는 많이 기뻐했고 나 역시 진심으로 흐뭇했다. 그가 이 작품으로 감독을 데뷔하는 데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면 기꺼이 최선을 다하리라 생각했다.
제작자와 연출부로 만나서 좋은 영화를 만든 경우는 많이 있다. 차승재 대표와 봉준호 감독의 만남이 그러하며, 오기민 대표와 정재은 감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곧 촬영에 들어가는 <목포는 항구다>의 김지훈 감독과 유인택 대표와의 시작도 그렇게 인연이 맺어졌다. 영화인생에서 행복한 만남이며, 좋은 결실들이다. 물론 지지고 볶고 싸운다. 결국에는 상처투성이로 헤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인생의 추함이 아니라 영화를 위한 고통과 아름다움의 상처들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또다시 만나게 되고, 영화를 만들기 위해 다시 고군분투한다. 영화를 만드는 세대들이 많이 바뀌고 있다. 굳이 연출부 경험을 거치지 않고, 단편영화만을 통해서 감독으로 데뷔하는 경우도 많이 생겼다. 어떤 경우든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한 왕도는 없지만, 제작자가 연출부를 만나서 감독까지 데뷔시킬 수 있다면 더없는 행복일 거라 고 생각한다. 오늘도 촬영현장에서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감독의 꿈을 키워가는 연출부들에게 진심으로 파이팅을 외치고 싶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 제작자들의 꿈도 하나라는 것을 꼭 전하고 싶다. 이승재/ LJ 필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