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난과 동미는 오랜 친구다. 나난은 소심하고 귀엽다. 동미는 개방적이고 대범하다. 그런데 동미가 뜻하지 않게 임신을 했다. 문제의 남자와는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는데도 동미는 뜻밖에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한다. “내 애니까”가 이유다. 기겁해서 “미쳤냐”고 뜯어말려도 동미는 끝내 듣지 않는다. 나난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그래, 낳아라, 이년아. 내가 애 아버지가 될게. 분윳값도 대주고.” 그리고 친구를 안아준다.
다음주에 개봉하는 <싱글즈>의 한 대목이다. 내가 친구라면 동미를 두들겨패서라도 끝까지 말리겠다. 한국사회에서 미혼모가 된다는 건 100가지 시련을 자초하는 일이다. 더구나 동미는 순정파도 도덕주의자도 아니며, 갑자기 종교적 각성이 찾아온 것도 아니다. 동미는 그를 아끼는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말리고 싶은 길을 가려는 것이다.
지난 5월 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된 홍기선 감독의 <선택>은 한국전쟁 때 포로로 잡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낸 김선명씨의 옥살이를 그린 영화다. 그는 자전거포를 내는 게 소망이다. 그리고 사회주가 옳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가 감옥에서 나올 수 있는 길은 아주 간단했다. 그걸 옳지 않다고 말하는 문서에 서명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가 혁명가였다면 서명하고 나와서 혁명에 복무하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혁명가도 지식인도 아니었다. 자유주의자는 물론이고, 사회주의자조차 그의 선택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길을 갈 수 없었다.
살다보면,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어떤 선택을 할 때가 있다. 뭘 몰라서가 아니라 그것 외에는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없다고 몸이 느낄 때다. 그런 선택만 골라서 하는 사람은 ‘또라이’나 ‘꼴통’으로 불리지만, 내 경험으로는 그 부류가 아닌 사람에게도 그런 선택의 순간이 인생을 살면서 한두번은 오는 것 같다. 대개 동미나 김선명씨처럼 생명존중이나 양심의 자유 같은 심오한 주제를 짊어질 수 없는 사소한 선택일지라도. 어쨌거나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에게 욕하거나 설득하는 일은 헛된 일이다.
동미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 선택을 하려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좋은 일이란 그저 말없이 안아주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게 그에게 유일한 그리고 최상의 선물이다. 그 선물을 줄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축복이다. 뜻밖에 그런 축복을 누리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독자 여러분도 그런 사람을 만나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과분한 직책을 맡아 쩔쩔매며 일해왔고, 이제 마지막 잡설을 마칩니다. 실은 이 글을 쓰는 내내 ‘떠날 때는 말없이’라는 가요 제목을 떠올렸습니다. 그게 멋지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잡설로 지면을 채우고 말았군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