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벌써 ‘왕언니’가 됐나요? 어휴, 진짜 그런가봐요.”유진희(36) 감독이 웃으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1996년 <골목 밖에서> 이래 햇수로 8년. 이제 ‘중견’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다. 그런 말 정도는 들을 수 있게 작업 활동을 해왔다.
그녀는 홍익대 서양학과를 나왔다. 졸업하고 미술학원도 해보고, 한때는 걸개그림 등 민중미술 운동에도 정열을 바쳤다. 이성강 감독과 한팀을 이루기도 했다. 그렇게 뜨거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20대 후반 어느 날, 문득 캔버스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컴퓨터 모니터를 보았다.
“그림은 넓은 전시장이 없으면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컴퓨터는 종이도, 물감도, 그런 것들을 놓아둘 공간도 필요없더라고요. 모니터라는 공간 속에서는 뭐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모니터 속에서 움직이는 그림을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애니메이션으로 관심이 옮겨졌다. 마침 개설된 영화아카데미 애니메이션 전공 1기로 입학, 자신만의 세계를 다져나갔다. 하지만 얼마나 고단한 일인가. 이 땅에서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래서 그녀는 다른 방향을 생각했다.
“처음엔 독립 애니메이션을 상품화한다는 것에 대해 제 스스로 거부감이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상품화되지 않은 애니메이션은 살아남기 어렵다’로 바뀌었어요. 물론 작품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면 더 좋은 것 아니겠어요?”
2002년 1월 회사를 차렸다. 이름은 ‘비온뒤’(BonD, www.b-on-d.com).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지었다. 영어로 만든 제목도 뭔가 치열함이 느껴지는 것 같아 마음에 든다고. 후배 2명을 영입하고 나니 ‘이제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를 내놓았구나’ 하는 생각에 더욱 긴장하게 된다.
“회사를 만들고 나니 작품보다 영업쪽에 시간을 더 투자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많은 분들에게 우리가 하는 일을 설명하고 포트폴리오를 보여드리는 일이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첨병이라는 생각에 보람도 느껴요.”
그녀는 독립 애니메이션계에도 ‘대중성’ 예방 주사가 절실하다고 말한다. 애니메이션 형식을 이용한 타이틀, 삽입용 프로그램 등으로 광고나 방송제작자들에게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니 효과가 좋더라’라는 인식부터 심어주는 것이 급선무라는 얘기다. 그런 차원에서 시작한 KBS 가 나름대로 시청자들에게 호평을 받은 것이 그녀에겐 너무 반갑고 고맙다. KBS 신년특집 다큐멘터리 <해신 장보고>에 삽입된 애니메이션을 만들며 이런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최근 제작한 LG홈쇼핑 이미지 광고에서는 이런 자신감이 배어 있다. 게다가 방송용 콘티부터 데모 컨펌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인터넷으로 진행하면서 작품 질은 물론 납품까지 확실한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것이 유 ‘사장’의 자랑이다.
22분짜리 TV시리즈로 기획한 <호박전>은 지난해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으로부터 파일럿 프로그램 지원작으로 뽑히기도 했다. 저예산 독립 단편을 하면서 얻은 노하우를 좀더 많이 접목시켜, 만드는 사람도, 돈 대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부담없는 작품으로 만들 생각이다.
“제가 졸업할 무렵에 많은 친구들이 생업을 위해 디자인 업계를 기웃거렸죠. 당시 디자인 업계 상황은 너무 어려워 고생이 많았아요. 하지만 지금 보세요. BI, CI 개념이라는 것을 만들면서 무섭게 발전했잖아요. 지금 애니메이션 업계는 10년 전 디자인 업계와 비슷하다고 봐요. 시장은 개척하는 사람의 것 아니겠어요?” 정형모/ <중앙일보> 메트로부 기자 hy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