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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점프> 종간과 한국 만화시장 독법

대형 출판사에 침을 뱉으마

<나인>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여자만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기사, 평론, 패션화보에 폭넓은 스타일의 만화까지를 보여주었던 그야말로 ‘잡지’였다. 젊고 새로운 시도는 빛이 났었다. 상업적 만화의 독법에서 벗어난 만화들도 대거 소개했다. 그런데 이 잡지가 너무 빨리 시장에 나왔었을까, 독자들이 점차 잡지를 외면했다. 결국 <나인>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폐간되고 말았다. 좋은 친구를 잃는 기분. 한달의 즐거움을 빼앗기는 기분. 그보다 더 큰 앞으로의 희망을 차압당하는 기분이었다.

하나의 잡지가 시장에서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하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낯익은 연재작들에 대한 기대가 사리지고, 완결을 보지 못하는 서운함과 이 잡지를 통해 ‘만화’를 그릴 수 있었던 많은 작가들의 앞날에 대한 당혹감이 매우 복합적으로 작용해 생체리듬을 떨어뜨린다. 그깟 잡지쯤을 가지고 뭘 그러느냐고 타박을 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잡지는 다양한 만화가 존재할 수 있는 터전이기 때문에 그렇다. 만화시장이 변화해가고 있지만 좋은 잡지가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인큐베이터가 된다는 사실은 그대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지는 폐간할 수 있다. 유럽 만화시장의 오늘을 있게 한 잡지 <필로트>도 폐간했고, 일본의 언더그라운드만화를 끌어간 <가로>도 폐간했다. 폐간에는 상업적 정당성이 등장하는데, 버티기와 다양한 시도해보기라는 필수적인 조건이 따라붙는다. 즉, 아무리 어려워도 적자를 감수하고 잡지를 펴내는 버티기 시도와 변화한 시대와 독자의 요구에 맞춰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는 변화의 시도가 잡지폐간 이전에 ‘적어도’ 몇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번 <영점프>의 폐간 소식은 인터넷 게시판에 기자가 올린 글을 통해 전달되었다. 공식적인 예고도, 준비도 없이 심지어 <기생수>의 작가 이와아키 히토시의 최신작 <히스토리에>를 연재한 바로 다음호에 폐간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이건 경영의 횡포이자, 작가와 독자가 소통하는 생명의 유기체인 잡지를 살해하는 참혹한 사건이다.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최소한의 배려를 해주었다면, <영점프>를 아끼는 독자들이 그토록 이번 폐간 결정에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영점프>는 고질적인 유통문제의 대안으로 정기구독자 모집을 공격적으로 진행하지 않았던가. 14호로 폐간이라면, 12호, 13호를 보고 정기구독을 신청한 독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작은 출판사이기 때문에 한 잡지를 만드는 데 엄청난 적자를 감수해 출판사 존립에 위기가 온다면 모를까, 적어도 한국을 대표하는 대형 출판사에서 독자와 작가를 무시하고 독단적인 중단 결정을 내린 것은 참 암담한 일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대형 만화출판사에 품었던 나약한 연정을 거두어야 한다. 시장이 위기에 몰리면 시장의 중심에 서 있는 출판사가 냉정히 시장을 분석하고 대안을 만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버려야 한다. 위기에 몰리면 안일하게 물량으로 밀어대며 수익을 올리는 지긋지긋한 물량 중심, 일본 만화 중심의 출판풍토를 벗어나 스스로 총량을 규제하고 만화를 하나의 작품으로 관리하지 않을까 하는 꿈도 접어야한다. 대형 만화출판사들은 방사능 오염을 통해 태어난 고질라처럼, 일본 만화의 힘에 기대 탄생했고, 일본의 히트작을 통해 사세를 키웠으며, 일본 출판사의 모범을 따라 잡지를 만들었다. 더 냉정하게 혹평하자면, 그들에게 새로운 것을 기대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이 보고 배우고 있는 일본 만화에서 새로운 시도가 등장하기를 바라는 편이 더 빠를 것이다.

<영점프>는 갔다. 마지막을 배웅하는 심정으로, 그들의 새로운 시도를 복기해보자. 영지에서 최초로 중철을 시도하며 다양한 장르의 만화를 배치했다. 판타지, 학원폭력물 일색에서 벗어나 군대 이야기, 연애물, 무협물, 풍자적 성애물로 장르를 다양화했고, ‘인디존’이라는 고정 섹션을 통해 강무선, 메가쇼킹만화가, 석정현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게다가 신인을 과감히 기용해 만들어낸 (최규석)나 <정전기>(변기현) 등의 작품은 한국 만화의 미래를 엿보게 하는 작품들이었다. 이유정의 <미나>나 김연서의 <닥터 리비도>도 아쉬운 작품이다. <미나>는 18살 여고생의 늘씬한 종아리와 흰색 팬티 대신 근육질의 킬러를 내세워 자신이 그동안 보여주었던 섹슈얼리티와 폭력의 세계를 다시 해체하고 재조립한 작품으로 기대를 갖고 다음회를 기다리던 작품이었다. <닥터 리비도>는 작가 특유의 유쾌한 상상력이 다양한 공명을 만들어내는 작품이었다. 어디 이뿐인가, 사라지는 만화는 늘 안타까운 추억을 남긴다. 정부에서 만화잡지를 출판하면 가장 확실한 만화진흥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드는 며칠이었다.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