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그 놈의 지성미가 없어서
나는 아주 재미있게 본 영화의 줄거리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건 내가 영화를 지독히 파편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은 아나이스 닌 얼굴만 쳐다보다가 나왔고, <동사서독>은 사막의 결투장면 이후 영화와 무관한 잡생각을 하느라 그 뒷부분은 다 놓쳤다. <안개 속의 풍경>은 음악과 그리스의 황량한 풍경에 반해, 낯선 카페에서 멍하게 창 밖을 내다보는 기분에 젖어 있다가 나왔다. 나는 영화를 춤 보듯 본다. 춤을 보는 데 의미와 스토리가 불필요하듯이 영화도 어떤 질감을 직송해주는 영화가 좋다. 스토리를 이해하기 위해 수학적 머리를 굴려야 하는 영화는 질색이다. <매트릭스>의 줄거리를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워낙 줄거리가 복잡하고 모호하고 관념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애초에 이 영화의 줄거리를 따라갈 의사가 없었다. 내가 이 영화를 보는 이유는 무용 같은 액션장면이나 기발한 모양의 전함에서 대단한 시각적 쾌락을 느끼기 때문이다. 관음에 추리적 사유는 방해가 된다. 나는 종류가 다른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못한다. 이 영화의 그림 보는 재미만으로도 관람료가 아깝지 않기 때문에 이 영화의 철학 강의는 송구스러웠다. 보드리야르나 데리다의 철학은 나중에 도서관에서 책으로 따로 보면 될 것 같았다. 머리 나쁘면 부지런하면 되니까. 그리고 머리가 나쁠수록 말로 하는 철학은 선명한 언어로 봐야지 그림과 모호하게 섞인 걸 보면 뇌의 회로가 합선될 위험이 있으니까. 그림으로 철학 하는 건 머리 좋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효율 아닌가!
<쟈니 잉글리쉬>는 나중에 도서관에서 따로 철학책 봐야 할 일이 없어서 좋았다. 이야 다 아는 영화이고, 제임스 본드 역할을 영국 최고의 코미디언이 맡는다고 생각하면 그게 바로 이 영화다. <쉬리>에 한석규 대신 강호동이 등장했으니 줄거리는 신경 끄고 강호동의 행보만 주목하면 되는 영화다. 내가 이 영화를 돈 내고 보러 간 것도 순전히 ‘미스터 빈’ 아저씨를 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로완 앳킨슨의 열광적인 팬이다. 그는 짐 캐리의 열배쯤 웃긴다. 짐 캐리가 웃기기 위해 입과 몸을 분주하게 움직여야 하는 시간에 그는 얼굴의 근육만 실룩거리면 된다. 말로 하는 개그는 언제나 실패의 위험을 안고 있다. 웃기는 데 실패한 개그맨의 개그는 남루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개그는 자신을 들이미는 듯하지만 사실은 끝없이 자신을 숨기며 타인을 끌어들인다. 이 화법은 근원적으로 비열하다. 희극배우가 발언권을 얻는 대가로 지불하는 비용은 자신을 조롱의 희생양으로 바치는 것이다. 말로 하는 개그에는 무임승차자의 불안이 깔려 있다. 간혹 말로 하는 개그를 몸으로 하는 코미디보다 더 지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메릴 스트립이나 수잔 서랜던 같은 배우들이 생각난다. 이 배우들은 진보적인 정치의식을 갖고 있고 지적인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실제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도 좋아해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준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성미 넘치는 배우’라는 말이 좀 어색해 보인다. 배우는 그 사람 머릿속에 든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드러내는 감정으로 승부를 보는 직업이다. 그 안에 지식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떤가. 그리고 도서관에 처박혀 직업적으로 공부만 해도 지성미를 갖추기 어려운 판국에 할리우드 같은 요지경을 생의 무대로 삼으면서 도대체 어느 겨를에 지성미를 갖추었단 말인가. 지성미도 연기로 커버했으리라 짐작되지만, 배우이면서 왜 굳이 그런 이미지를 부각시켰을까? 배우로서의 외모와 에너지가 부족하니까 주류사회의 기호가치를 부목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미스터 빈은 옥스퍼드 출신이지만 바보의 이미지로 침묵하고 관객 앞에 자신을 들이민다는 점에서 이 배우들보다 훨씬 ‘진정한’ 배우다.
심수봉의 <사랑밖에 난 몰라> 가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낯이 간지럽다. 너무 단순유치하다. 그런데, 그 가사로 청중을 침묵하게 한다. 이것만큼 무구한 ‘딴따라’의 이미지가 어디 있는가. 나는 습관적으로 근사한 가사에 의존하는 가수를 믿지 못한다. 아마 여기에도 지성미가 동원되리라. 말은 거짓이고 노래는 진실이라는 말을 나는 믿는다. 미모를 겨루는 데서는 학벌을 들이밀고, 지식을 겨루는 데서는 미모를 들이미는 이중간첩의 복화술은 유용한 처세의 문체가 됐다. 나는 <쟈니 잉글리쉬>가 그런 이중간첩의 세계에 던져진 정상적인 간첩이 얼마나 웃음거리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영화처럼 보였다.남재일/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