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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런 우화, 멋들어진 비유,<성질 죽이기>와 <폰부스>

<성질 죽이기>

애덤 샌들러는 이제껏 함께 공연해본 적 없는 새로운 스타들을 끌어들여, 최신작 <성질 죽이기>에서 다시 한번 샌들러 특유의 세계를 그려낸다. 여기서 그가 맡은 캐릭터는 전작들과 물론 비슷한, 정신적 상처를 안고 사는 호구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친구(마리사 토메이)를 사람들 보는 데서 키스하지도 못할 만큼 수줍고 착취를 일삼는 직장상사에게 대들 만한 배짱도 없지만,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겹쳐 비행기 승무원을 공격하는 일대사건이 벌어지고, 그리하여 20시간의 성질 죽이기 프로그램 수강을 명령받는다. 동료 수강생들은 라틴 퀸을 연기하는 루이즈 구즈먼, 사이코 같은 수의사 존 터투로, 아주 그럴듯한 포르노스타 한쌍 재뉴어리 존스와 크리스타 앨런이다. 그리고 의사는 악마 같은 선(禪)의 대가 잭 니콜슨으로서, 전작을 한편도 못 본 관객일지라도 그가 실은 따뜻한 마음씨를 숨기고 있는 인물임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니콜슨의 치료방법은 특이하다. 샌들러를 러시아워 때에 맞춰 복잡한 퀸스보로 브릿지로 내몰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I Feel Pretty> 같은 세레나데를 부르게 한다. 매우 꺼려하는 이 환자에게 너무도 모멸적인 섹스파트너들을 구해주기도 한다. 헤더 그레이엄이 연기하는 술집 죽돌이 알코올 중독자라든가 우디 해럴슨이 연기하는 성도착자라든가 말이다. 이제는 불교 승려가 됐지만 어린 시절 샌들러에게 지독한 고통을 안겨주었던 인물(존 C. 라일리)을 결국 기억에서 끌어내 대면하게끔 몰아붙이기도 한다. 급기야는 양키 스타디움까지 진출하고서야 이야기를 맺는 <성질 죽이기>는 초지일관 괴팍스럽고 심지어는 초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수수께끼 같은 니콜슨의 12단계 프로그램은 이리저리 뒤엉키며 비틀대다가 지긋지긋한 애송이들의 소란과 호모섹슈얼 잡소동들로 간신히 마무리된다. 무엇보다 진정 비논리적인 것은 ‘성질 죽이기’와 ‘긍정적 시각 갖기 훈련’이 성급하게 뒤섞였다는 점이다. 그게 다 치료인가보다.

바야흐로 미국이 전 국민적으로 성질 죽이기 프로그램을 수강해야 할 위기라고 사람들이 믿는다면, 피터 시걸이 연출하고 데이비드 도프먼이 각본을 쓴 이 영화는 혼란스런 우화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우리나라에 있어 매우 힘든 시기다”는 대사야말로 요즘 미국을 떠돌아다니는 시대정신을 대변하는지도 모른다.

<폰부스>

래리 코언의 각본을 바탕으로 조엘 슈마허가 만든 이 꽉 짜인 80분짜리 작품은 깊이, 그리고 훌륭하게 시대착오적이다. 논란할 여지가 없이 훌륭한 이 저예산 하이 컨셉 스릴러는 또한 호러 코믹 도덕 이야기를 아우른 유럽의 1962년 커피하우스의 단막극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이상하리만치 줄곧 화제를 몰고 다니기도 했다. 원래는 지난해 가을 개봉예정이었으나 한달 전 워싱턴 D.C.에서 일어난 무차별 연쇄저격사건과 닮았다는 이유로 개봉이 미뤄졌던 바 있다. 똑똑한 척 입만 나불거리고 불성실한 뉴욕의 3류 홍보맨(콜린 파렐)은 그가 사무실처럼 사용하는 시내 한복판 타임스퀘어의 투명한 공중전화박스에서, 가까운 곳 유리창 너머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그래서 오로지 전화목소리로만 존재할 뿐 보이지는 않는 어떤 괴한에 의해 옭아매어진다. 그리하여 드라마는 자칭 ‘미디어 상담자’라는 이의 망원경 십자선 안에서 벌어진다. 파렐은 누군지 모를 공포의 조종자를 안심시키고 달래는 한편, 피자배달부, 창녀, 포주, 그리고 뉴욕 경찰의 절반 정도를 상대로 자신을 또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포레스트 휘태커가 신경증적인 경찰로 나온다).

<폰부스>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관한, 멋들어진 싸구려 비유다. 이런 싸구려 비유는 이 각본작가의 특장 중 하나이기도 하다. 카뮈나 사르트르가 이런 시나리오를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안티히어로가 죽음의 위협 아래에서 수수께끼 같은 목소리만을 따라 행동한다는 이 설정을 보라. 그 목소리는 오로지 파렐 자신만이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온갖 월드 미디어가 동일한 정보와 쇼를 동시에 만인에게 쏟아내는 이 세계에서 말이다. 대단한 비유다. 슈마허는 이를 비유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광기를 스크린 입자로 치환해 화면에 박아넣고, 화면분할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 지구를 도는 미디어 위성들을 이리저리 비춘다.

슈마허의 솜씨도 좋았지만, 화제를 몰고 다니는 타블로이드 신문식 세계관으로 인해 미국의 마지막 추상적 센세이셔널리스트로 꼽히는 코언이 자기 각본을 직접 연출하지 않았다는 것은 여전히 아쉬운 일이다. 대사는 종종 소중하다 싶을 정도로 흥미롭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조종자에게 사로잡혀 공개적으로 자기 고백을 하도록 명령받은 파렐은 문을 부수며 허공에 대고 절규한다. “나는 그저 거짓말들의 커다란 사이클의 일부일 뿐이야… 나는 대통령이 돼야 했는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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