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내 멋대로 기념일’ 같은 것이 있지 않나요. 생일도 개천절도, 어버이날도 스승의 날도 아닌데, 사소하고, 별볼일 없는 날인데, 그냥 나 혼자 만들고 혼자 기념해버리는 그런 날. 7월3일은 저에게 그런 기념일 중 하나입니다. 7월3일은 바로 지난해 6월30일 월드컵이 폐막하고 시작한 드라마 <내 멋대로 해라>의 첫 방송일이었습니다. 붉은 악마 티셔츠만큼이나 뜨거운 반응 속에 방영되던 드라마 중간, 인터뷰를 하자고 홍익대의 어느 골목으로 불쑥 그를 불러낸 저는 잠시 할말을 잃었던 것도 같습니다. 브라운관 넘어 사랑해버린 사람들의 조물주가 거기에 마른몸을 털털거리며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초겨울이었던가요. <네 멋대로 해라>의 미진이 여전히 남아 있는 서울거리를 떠나 훌쩍 파리로 날아간 그에게서 엽서가 한장 날아왔습니다. “건물들이 낮아서 구름도 낮습니다. 그리고 물처럼 흐르는 게 파리의 구름입니다. 에펠탑이 보이는 파리의 지붕 밑이 제 방입니다. 내 집 입장에선 지붕 밑이고 남의 집 입장에선 지붕 위입니다. … 아주 춥다고 말했습니다. 발이 시립니다. 다시 엽서 보내겠습니다.” 그 흔한 잘있었니, 하는 안부인사조차 없었지만 잠시 마음은 여행 떠난 사람처럼 설레였던 것 같습니다. 0.75유로짜리 우표가 전해준 파리의 겨울, 누군가의 안부.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다시 또 다른 여름이 왔습니다.
자신이 막을 열었던 <여고괴담> 시리즈가 배출한 3번째 졸업생이 문을 닫게 될 이번 부천영화제에 단편부문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한 그는, 최근 장선우 감독의 조감독을 거친 인진미 감독의 데뷔작인 호러영화 시나리오 집필에 한창입니다. 요즘 그는 “뭐가 진짜 무서운 걸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쯤 그가 호흡을 불어넣는 사람들을 혹은 떠도는 영혼들을 만나게 될까요? “글쎄요, 조금씩 자주 써놓는 편이 아니고,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식이라서 조금 더 기다리셔야 될 것 같은데요?” 부디 그가 우리를 단발적 위협과 허망한 괴성으로부터 구하게 되기를, 가짜 공포가 아니라 가슴 속 진짜 공포와 대면할 기회를 하루빨리 안겨주기를.글·사진 백은하 luci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