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에 태어나 아흔여섯해를 살았고, 그중 60년을 카메라 앞에서 보냈으며, 12번의 오스카 후보에 올라, <모닝 글로리>(1933), <초대받지 않은 손님>(1967), <겨울의 사자>(1968), <황금연못>(1981)으로 4개의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손에 쥔 그녀에게 20세기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여배우라는 찬탄이 과찬은 아닐 것이다. 이제 그 찬사는 그저 영전 앞에 놓이는 조화가 되었지만…. 캐서린 헵번이 2003년 6월29일 미국 코네티컷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오드리 헵번이 치마를 입은 말괄량이였다면, 그보다 20년이나 먼저 데뷔한 캐서린 헵번은 바지를 입은 말괄량이였다. 어린 시절 가족들이 부르는 캐서린이라는 이름이 싫어 머리를 손수 깎고 자신을 ‘지미’라고 소개하던 그 이상한 소녀가 연극무대를 거쳐 영화에 도착했을 때, 1930년대 미국은 새로운 여성상을 마주해야만 했다. 모두가 롱치마와 밍크코트로 몸을 두르고 맵시를 뽐낼 때, 툭 튀어나온 광대뼈를 숨김없이 드러내던 캐서린 헵번은 과감하게 치마를 벗어던지고 헐렁한 남성용 바지와 굽 낮은 구두를 신었다. 그녀의 복장은 1930∼40년대 미국의 패션에 변화를 주었고, 그런 남성적인 의복에 어울리는 그녀의 외모는 ‘완고함, 씩씩함, 무뚝뚝함’ 같은 수사들을 동반하며 독립적이고 의지력 넘치는 여성상으로 스크린 속 자신의 이미지를 세워갔다.
1932년 조지 쿠커의 <이혼 약정서>로 데뷔한 캐서린 헵번은 단 세 번째 출연작 <모닝 글로리>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차지했다. 그리고는 ‘말괄량이 영화’(flapper movie) 장르와 스크루볼코미디 장르를 종횡무진하며 행진을 계속했다. <작은 아씨들>(1933)에서는 말괄량이 둘째딸 ‘조’ 역을 맡았고, 하워드 혹스의 <아기 키우기>(1938)에서는 캐리 그랜트와 호흡을 맞춰 자유롭고 활발한 상속인 ‘수잔’ 역할을 맡았다. <아기 키우기>의 흥행실패가 그녀에게 “흥행 독약”이라는 악의 섞인 별명을 선사했을 때도 그녀는 여전히 꿋꿋했다. <휴일>(1938)에서는 씩씩한 사교계 여성으로, <필라델피아 스토리>(1940)에서는 좌충우돌형 여성상 ‘트레이시’로 등장하여 명예를 회복했다. 1952년 <아프리카의 여왕>의 캐서린 헵번에게 아프리카 외지에 살고 있는 도덕과 의지로 똘똘 뭉친 여성상이란 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씩씩함과 완고함, 도덕성은 늙어가는 그녀에게 현명함의 이미지를 덧붙였다. 캐서린 헵번의 생애 마지막 출연작 <러브 어페어>(1994)에서 그녀는 주인공 워런 비티의 다정한 아주머니로 등장하여 엇갈린 두 남녀의 사랑에 조언을 주는 인생의 현자로 남는다.
<러브 어페어>의 마지막 모습이 어울렸던 건, 그녀 자신이 실제로 그런 사랑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캐서린 헵번은 <아담의 갈비뼈> 등 9편의 영화에 같이 출연한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기혼남이었다)와 1967년 그가 죽는 순간까지 27년간 열애를 유지했으며, 끝내 죽을 때까지 ‘미스’로 남았다. 12번 오스카 후보에 올랐어도 단 한번도 행사장에 나간 적이 없고, 인터뷰를 거절하기 일쑤였던 캐서린 헵번은 1991년 말년에 <나의 모든 것>이라는 자신의 텔레비전 자서전 제작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는 거기에서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그녀의 의지 때문이었겠지만, 기다림에 대한 믿음 때문은 아니었을지. 그래서, 우리의 쓸쓸함을 대신하는 말로, “천국에서도 행복하시길”. 글 정한석·사진 SYG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