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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피곤한 29살아..<싱글즈>
2003-07-08

누구에게나 ‘9’자가 들어간 나이야 싱숭생숭한 법이지만, 그 중에서도 남자의 39살 만큼이나 우울한 게 여자의 29살이다. 거기다 미혼이라면. 가족과 주변의 온갖 결혼 압력도 그렇지만 길거리만 나서면 팽팽한 20대 초반 아이들이 까르르거리고 다니는데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도 은근히 새침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직장 말이 커리어우먼이지, 잘나가는 몇 명 빼놓는다면 위아래로 치이기 십상인 나이다.

<싱글즈>의 나난(장진영)과 동미(엄정화)도 딱 이런 대한민국 29살 직장여성이다. 직장 스트레스로 머리에 난 구멍을 발견한 날, 나난은 남자친구에게 차인다. 거기다 디자이너실에서 밀려 레스토랑 매니저로까지 발령난다. 확 그만둬버려 “대출금 이자 내야지, 공과금 내야지, 카드값 메꿔야지” 한달에 100만원은 꼭 필요한 나난, 눈물 머금고 레스토랑에 출근한다. 그런 나난에게 트렁크를 열어야 차문이 열리는 고물차를 끌고다니며 ‘작업’엔 능숙한 남자 수현(김주혁)이 접근한다.

보증금이 없어 어렸을 적부터 친구 정준(이범수)과 동거 아닌 동거를 하는 동미(엄정화), 매번 사귀는 남자를 당당히 집안에 데려올 정도로 분명한 연애관과 섹스관을 가진 그다. 직장 상사는 그가 몇달을 매달린 프로젝트의 성과를 빼앗고 은근히 유혹까지 한다. 확 그만둬버려 동미는 해낸다. 유혹하는 상사의 바지를 벗겨 사람들 앞에 패대기친다. 동미와 정반대로 몸과 마음이 일치하는 순수한 사랑을 그리는 정준과 어쩌다가 동침, 덜컥 임신을 하게 된다.

<싱글즈>는 칙칙한 현실과 허무맹랑한 판타지의 균형을 잘 잡아나간다. 그동안 텔레비전 트렌디 드라마에서 싱글들은 소비문화의 첨단처럼 그려져왔다. 혼자 살아도 일하는 사람 쓰는 것보다 더 깨끗하고 윤기나는 집안 가구와 주방, 깔끔히 정리돼 있는 침대 시트까지. 아침에 깨워주는 이도 없이 자명종에 의존해 회사에 뛰어가야 하는 싱글들에게 이런 집안 환경이 가능한 일인가 영화 속 동미와 정준의 집은 흔히 보는 다세대 주택이고, 나난의 방은 깨끗하긴 하지만 적당히 여기저기 물건들이 쌓여 있다. 그런 현실적 환경의 묘사에서 영화는 사실감 있는 상황들을 구축해간다.

그렇다고 대중적인 상업영화의 규모를 넘진 않는다. 눈길을 끄는 배우들(특히 엄정화)의 자연스럽게 리듬을 타는 연기와 생활밀착형 대사, 텔레비전 드라마 같은 카메라의 움직임은, 현실의 고민을 끌어오되 경쾌한 스타카토처럼 짧게 끊어 넘긴다. 아는 남자와의 섹스 꿈을 꾼 친구에게 “그러다 병 걸린다, 지랄밝힘증”이라고 대꾸해주거나, “우리 나이에 목돈 마련하는 길은 결혼하는 것밖에 없다”는 말은 이즈음 나이라면 누구나 해봄직한 말들이다.

영화에서 남자는 딱 두 부류다. 나난과 동미의 직장상사처럼 수고한다고 여직원들 엉덩이나 툭툭 치고 “여자가 프리젠테이션 하는 것 봤습니까”라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는 ‘나쁜 남자들’과, 정준이나 수헌(김주혁)처럼 건강한 친구로 남는 ‘착한 남자들’이다. 그 중간 스펙트럼 없이 친구 아니면 적으로 나뉘는 건 아쉽지만, 적어도 이 구도는 여성의 일과 여성간의 우정이라는 주제를 명확히 드러내는 데는 일조한다.

미혼모의 길을 선택한 동미와, 인간성 좋고 조건도 좋은 남자친구와의 결혼·유학의 길을 미룬 채 동미의 옆에 남은 나난이, 영화처럼 밝게 살아갈 수 있을까. 온갖 선입견과 여성에 대한 장애물 가득한 사회에서 그들의 선택이 과장스럽게 보일지라도, 눈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거리를 뛰어가는 저들의 뒷모습은 무조건, 전폭적으로 지지해주고 싶다. 11일 개봉.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