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을 사로잡을 판타지 8편
넌 누구지? 너 자신을 믿을 수 있겠어?
원더풀 데이즈
Wonderful Days
감독 김문생/ 한국/ 90분/ 개막작
잿빛 그늘이 내려앉은 서기 2142년 지구. 선택받은 자들의 도시 에코반은 오염물질을 태워 동력을 얻고 있다. 친구의 배신 때문에 버려진 도시 마르에서 살고 있는 수하는 오염물질이 부족해진 에코반이 마르를 불태우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파국을 막으려 한다. 에코반 동력 시스템에 침투한 수하는 십년 만에 어린 시절 사랑했던 제이를 만난다. 제이는 단 한번 푸른 하늘을 보여주었던 수하가 적으로 나타났다는 현실 앞에 갈등하고, 수하를 배신했던 연적 시몬은 또다시 두 연인 사이에 끼어든다. <원더풀 데이즈>는 실사 촬영과 미니어처, 3D와 2D를 특성에 맞게 배치한 엄청난 화면이 돋보이는 애니메이션. 4년에 가까운 제작기간과 100억원 넘는 제작비를 들여서 맑게 갠 하늘처럼 눈이 부신 그림을 만들어냈다. 오페라처럼 장중한 음악이 비극으로 치닫는 젊은이들의 운명을 마음 울리는 드라마로 이끌어간다.
싸이퍼
Cypher
감독 빈센초 나탈리/ 캐나다/ 97분/ 폐막작
‘하우스 호러’의 컨셉을 차디찬 정육면체 안에 농축했던 <큐브>를 기억하는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을 빈센초 나탈리 감독의 신작. 평범한 권태, 권태로운 평범함에 젖어사는 모건 설리반은 장인의 회사에 들어가라는 아내의 요구를 외면하고 대기업 디지코프의 스파이로 이중생활에 들어간다. 잭 써스비라는 가명으로 미국 전역의 무역회의를 돌며 정보를 전송하던 모건은, 리타라는 여인으로부터 첩보업무는 눈속임일 뿐이고 정작 조작되고 있는 것은 당신의 기억과 정체성이라는 말을 듣는다. 리타가 준 각성제로 기억을 보존한 모건은 선웨이라는 또 다른 대기업에 고용돼 이중 산업스파이 노릇을 하게 되지만, 자기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믿을 수 없는 미궁에 빠진다. ‘싸이퍼’란 고정된 정체성이 없는 사물이나 인간을 뜻하는 단어. 필립 K. 딕의 세계를 빌려온 듯한 <싸이퍼>는, 메이저 배급선을 탔다면 <매트릭스>나 <트루먼 쇼> 못지않은 토론의 불씨가 됐을 법하다. 색깔을 약품으로 씻어낸 듯한 스타일리시한 찰영, 360도 성격변화를 그리는 제레미 노섬의 호연, <큐브>를 잇는 메커닉디자인 감각이 빛난다.
부바 호텝
Bubba Ho-tep
감독 돈 코스카렐리/ 미국/ 92분/ 월드 판타스틱
호러팬들에게 판타즘(Fantasm) 시리즈로 유명한 돈 코스카렐리 감독이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를 살려냈다. 자신과 닮은 인물의 아이덴터티를 빌려 스타덤에서 탈출한 엘비스는 이제 늙고 병든 몸으로 병원신세를 지고 있다. 이젠 아무도 그를 못 알아볼 뿐 아니라, 자신이 엘비스라고 말하다가 미친 사람 취급만 받을 뿐. 그러다, 자신이 존 F. 케네디라고 믿는 늙은 흑인 환자와 힘을 합해 미라와 로봇을 합성한 듯한 정체불명의 이집트 괴물을 물리친다. 미국이 내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웅 캐릭터들을 늙고 병든 노인들에게 환치한 점이나, 괴물과 사투를 벌일 때 귀여울 정도로 조악한 특수효과 등, B급 정서의 매력이 넘치는 유쾌한 코미디다. <이블 데드>의 컬트 배우 브루스 캠벨이 엘비스로 분한다.
캔속의 미녀
Bijocan
감독 가케히 마사야/ 일본/ 60분/ 6mm 디지털/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참치캔 모양의 깡통에서 미녀가 튀어나오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캔마다 내용물로 어떤 여인이 들어 있는지 그림까지 붙어 있다면? <캔속의 미녀>는 ‘호리병 속의 지니’ 이야기의 최신판이다. 또는 인스턴트 수프 깡통으로 현대를 보여준 앤디 워홀을 영화적으로 재해석한 경우다. 상영시간 1시간에 불과한 초저예산 디지털영화의 한계가 있지만 아이디어만으로 박수를 받을 만하다. 주인공 남자는 최근 동거하던 여자친구에게 싫증을 느끼게 됐다. 홀로 살 방을 구한 남자는 옆집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캔 한 상자가 배달된 뒤부터 옆집에선 여자들의 소리가 들리고 아침마다 미녀들이 떼지어 나온다. 호기심에 옆집에 몰래 들어가 캔 하나를 훔쳐 돌아온 남자, 깡통에 적힌 대로 목욕탕 욕조에 내용물을 풀어놓자 30분 뒤 아름다운 여인이 목욕탕에서 걸어나온다. 여기까지는 단순한 포르노적 상상력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그 다음 이야기가 뻔한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진심으로 캔 속의 미녀를 사랑하게 된 남자는 그제서야 그녀에게 유통기한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1977년 출생한 가케히 마사야 감독이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첫 장편영화.
극도공포대극장 우두(牛頭)
Gozu
감독 미이케 다카시/ 일본/ 129분/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는 말이 안 되고 뒤죽박죽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지하다. 젊은 야쿠자 미나미가 어쩔 줄 몰라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당황해하고,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가려 애쓰다가, 이 기이한 이야기의 일부분이 되고 만다. 처음엔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조직의 보스는 미나미에게 미친 것처럼 보이는 중간 보스 오자키를 어딘가에 묻어버리고 오라고 명령한다. 미나미는 다정했던 형님을 죽이고 싶지 않지만, 형님은 교통사고로 어이없이 시체가 된다. 그리고, 그 시체가 사라진다. 시체를 찾아다니는 미나미는 영혼을 불러내라며 동생을 채찍질하는 여관주인과 꿈처럼 나타난 소대가리(牛頭), 자기가 오자키라고 주장하는 젊은 여자를 만난다. 야쿠자영화에서 판타지로, 다시 코미디와 공포영화로 종횡무진하는 <우두>는 미이케의 이름과 더없이 어울리는 영화. 변태 취향이 있는 보스가 죽음을 맞는 장면은 웃음을 참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에덴
Eden
감독 안제이 체크조트/ 폴란드/ 78분/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제한구역)
<에덴>은 유젝이라는 한 남자의 여행담이다. 그는 때로는 걷고, 하늘을 날 때도 있으며 바다를 항해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 유젝이 보고 듣는 건 일상적인 풍경이 아니다. 반인반수의 괴물들이 싸움을 하고 어느 영웅은 맹수에게 공격을 당한다. 그는 지극히 신화적인 공간을 헤매는 것이다. 유젝이 만나는 인물 중에선 살바도르 달리와 파가니니, 그리고 비틀스 역시 포함된다. 다시 말해서 <에덴>은 유럽 문화사를 한눈에 요약하는 작업이다. 신화와 전설, 그리고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을 애니메이션으로 끌어온 것이다. 감독인 안제이 체크조트는 만화가에서 일러스트 작가, 화가 등으로 일했다. 그에게 <에덴>은 장편애니메이션 데뷔작이다. 감독은 “<에덴>은 오래된 방식으로 회귀한 작품이다. 이것은 추상적인 예술이고 상징과 알레고리들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말한다.
드라이브
Drive
감독 사부/ 일본/ 102분/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사부’라는 감독은 우리에게 <포스트맨 블루스>라는 영화로 소개된 적 있다. 배우 겸 영화감독인 사부는, 기발한 유머감각을 지닌 것 같다. 만약 복면을 쓴 사나이들이 차로 뛰어들어 앞차를 뒤쫒으라고 한다면? 난리나겠지. 주인공 아사쿠라는 이 상황을 겪지만 그의 반응은 남다르다. 규정된 속도를 지키고 교통질서를 모두 준수한다. 오히려 복면의 강도들이 속터질 노릇이다. <드라이브>는 최근 유행하는 ‘웃음’의 코드가 만국 공통의 것임을 깨닫게 한다. 느끼한 남자, 웃기는 폭력배, 그리고 썰렁한 유머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은행강도들이 벌이는 소동극을 통해 현대 일본사회에 흐르는 허무적 공기를 전한다. 일당 중 한명이 록그룹의 무대에 올라가 벌이는 ‘공연’은 영화의 백미라 할 만하다. <하나비> 등에 출연했던 오스기 렌 등 우리에게 낯익은 조연급 배우들이 출연하고 있다.
머리 잘린 닭 마이크
Chick Flick(The Miracle Mike Story)
감독 알렉산더 필립/ 미국/ 69분/ beta 흑백, 컬러
1945년 콜로라로에서 태어난 수탉 마이크는 머리에 도끼를 맞아 목이 잘리고도 1년 반을 더 살았다고 한다. 영화는 ‘기적의 마이크’의 일생을 반추해보는 다큐멘터리 형식을 띠고 있는데, 증언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진지하고 사용되는 자료들 역시 그럴싸하다. 허구를 사실로 믿게 만드는 페이크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빌린 코미디인 셈. 이 이야기는 미국 소시민들의 집단적 트라우마에 대한 비유로 보이기도 한다. 이웃을 공산주의자로 의심하고 외부인을 침입자로 보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미국인들이 머리없이 살아가는 닭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일까? 문서, 만화, 자료필름, 애니메이션, 인터뷰 등 영화에 사용된 소재와 기법, 화면 편집이나 프레임 크기 등 모든 면에서 어떠한 원칙도 따르지 않는 자유로운 스타일로 만들어졌다.김의찬/ 영화평론가, 김소희, 남동철, 김혜리, 김현정
판타지 단편외계에서 온 조용한 상상력
가이 매딘 감독의 4분짜리 단편 <김리 병원 못다한 이야기>는 1988년 제작된 <김리 병원 이야기>의 편집과정 중 삭제된 장면들만을 모아 1999년에 따로 만든 영화이다. 군나의 아내가 떠올리는 기억, 그녀의 잊을 수 없는 사랑의 경험이 주내용이다. 짧지만 특징있는 <김리 병원 이야기>의 판타지 요약본이라 할 만하다.
조이아 트로피모바 감독의 <어린 왕자의 하루>는 크레용으로 그린 아동화의 느낌을 살린 7분짜리 애니메이션이다. 어느 행성에서 혼자 살며 꽃을 가꾸고 별을 닦는 어린 왕자가 마음잡고 때묻은 태양을 닦으려 하지만 점점 솟아오르는 해는 소년의 손길을 벗어난다. 해결의 지혜는 간단하다. 태양이 얌전히 서쪽 지평선으로 내려앉을 때까지 기다려라. 밤이 되어 혼자만의 집으로 귀가하는 왕자의 쓸쓸함과 귀여운 반전이 여운을 남긴다.
한 남자가 방 천장에 끈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한다. 끈을 잡아당기자, 남자의 방은 종이상자처럼 펼쳐지더니, 시간과 공간을 바꿔가면서 신비로운 세계로 거듭난다. 3D애니메이션 <끈을 당기면>(감독 제롬 드콕, 올리비에 라나르, 세실 드테, 드 라 드레브, 멜리나 밀상, 4분55초)은 밀도있게 채워진 상상력이 눈길을 끄는 영화. 쓸쓸한 결말도 인상적이다. 비둘기의 몸을 가진 고양이, 날개가 돋친 사람들, 날개 대신 손으로 퍼덕이는 비둘기. 실험적인 애니메이션 <오염>(감독 칼 스티븐슨, 6분) 회색 낙엽이 뒹구는 배경 위에 순수하지 못한 생물들을 늘어놓는다. 이분법이라는 의혹을 피할 수 없지만, 황량한 색조는 단순한 구조를 보상하고도 남는다.
아인시타인의 조수 페틴코트 박사는 우주의 비밀을 알고 싶은 욕망과 그에 미치지 못하는 능력 때문에 주눅들어 있다. 죽은 아인시타인의 두뇌를 훔친 그는 의사들에게 들키려는 순간, 이상한 소년의 손짓을 따라 시체 냉동고 안으로 뛰어든다. 그곳엔 <아인시타인의 놀이터>(감독 매튜 헤커링, 16분 54초)가 펼쳐진다. 인간이 계산할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을 형상화한 화면과 달리의 그림처럼 현실을 초월한 듯한 공간, <아멜리에>처럼 비현실적인 색채가 다소 난해한 드라마를 서정적으로 보완한다.
<맥도널드 소년>(감독 김미진, 18분)은 낙태를 감상적이고 보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그 시선을 영화로 만드는 방식만은 따뜻하고 귀엽다. 만삭의 임산부가 앉아 있는 병원 벤치로 치즈버거를 먹고 싶다는 소년이 다가온다. 순식간에 치즈버거 두개를 해치운 소년은 자신이 외계 행성에서 왔다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년의 이야기와 노래를 듣던 여자는 13년 전 지운 아기를 떠올린다.
미래의 구직센터, 일자리를 찾는 남자는 함께 기다리는 대기자들의 냉대와 융통성없는 관료들 때문에 좌절한다. 마침내 책상 앞에 앉은 그는 뜻밖에도 정체성의 문제와 부딪치게 된다. 가상현실이 현실을 능가하는 미래사회에서, 사라져버린 정체성의 문제를 독특하게 고민하는 영화. <신세계 비극배우>(감독 제럴드 맥모로, 13분)라는 제목의 의미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알 수 있다.
매혹과 열정의 발리우드카레향 가득한 춤과 노래, 그리고 사랑!
올해 부천의 여름은 카레 향기가 진동한다. 인도 물건을 팔고 전시하는 마켓, 인도 평론가 메낙시 셰데가 참석하는 메가토크를 사이드 메뉴로, 아시아 프리미어로 첫선을 보이는 발리우드영화들이 한 꾸러미이기 때문이다. <라간 : 옛날 옛적 인도에서>는 오스카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지명되면서 미국 개봉 기회를 얻은 화제작으로 인도판 이라 불릴 만하다. 1893년 영국 식민통치하에서 가뭄과 무거운 라간(세금)으로 고통받던 농민들은, 문화적 우월감에 가득 찬 오만한 영국군 대위로부터 뜻밖의 도전을 받는다. 영국 스포츠인 크리켓 시합을 벌여 영국인들을 이기면 라간을 3년간 면해주고 지면 세배로 내라는 것. 주저하던 주민들은 용감한 청년 부반의 지휘로 크리켓을 연습하면서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해간다. 민족감정과 스포츠영화의 공식을 발리우드 특유의 뮤지컬과 버무렸다. 상영시간이 225분에 이르러 다음 시간대 프로그램을 놓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할 것.
<데브다스>는 칸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받은 우아한 러브 스토리다. 십년 만에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데브다스는 자신을 그리워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촛불을 켜온 이웃집 소녀 파로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부유한 데브다스의 집안은 파로를 용납하지 않는다. 파로는 전처 소생 자식이 셋이나 있는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고, 데브다스는 아름다운 찬드라무키와 함께 유곽에서 쾌락에 탐닉한다.
상류계급 저택과 고급 유곽이 중요한 배경인 <데브다스>는 시끌벅적한 발리우드영화들과 달리 붉은색으로 빛나는 고혹적인 춤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파멸하는 남자와 그를 달래는 댄서들은 넋을 놓을 만하지만, 그보다 언급할 가치가 있는 요소는 두명의 주연 여배우다. 영혼을 빨아들이는 눈동자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테러리스트를 사랑했다>는 인도의 분쟁지역인 카슈미르를 중심에 두는 영화다. 정치색이 짙지만, 댄서들이 떼를 지어 기차 지붕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이나 사막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사랑의 댄스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는 아마르는 카슈미르 분쟁을 취재하러 가다가 메그나라는 젊은 여인을 만난다. 아마르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껴 무작정 동행하지만, 그녀는 한밤중에 혼자 떠나버린다. 메그나는 카슈미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이유로, 테러리스트가 된 여인이었다. <메이드 인 인디아>는 발리우드영화 초보자라면 입문 가이드로 볼 만한 다큐멘터리. 춤과 액션, 메소드 연기까지 넘나드는 주연배우들의 카리스마, 더빙 전문 가수의 활약, 불평등한 계층을 통합하는 발리우드영화의 사회적 기능 등 발리우드의 ABC를 중요한 영화인들의 인터뷰를 통해 익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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