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그래도 섹스는 하지 않는군
1995년 작가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보름 정도 일본에 머문 적이 있다. 다섯명을 인터뷰했는데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작가가 시마다 마사히코다. 오후 세시쯤 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섭섭하다면서 저녁에 자기가 한잔 사겠다고 했다. 저녁에 신주쿠에 있는 술집으로 갔을 때 그는 친구를 한명 데리고 나타났다. <CNN> 일본지국의 앵커인 이 여성은 흑인과 결혼하는 아시아 여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주변에 흑인과 결혼한 여자는 없어서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녀는 작가 야마다 에이미의 예를 들면서, 일본에서는 일본 여자가 흑인과 결혼하면 성적인 동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 남성의 졸렬한 포르노적 상상력과 성적 콤플렉스에 대해 비분강개해 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일본 여자와 흑인 남자의 결혼은 지식인들 사이에 많으며, 각각 성차별과 인종차별에 대한 피해자의 연대감에서 맺어진 관계이다. 그러니까 상처받은 내면의 어떤 절실함이 현실적인 장애를 넘어 사람을 찾도록 만든 것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 영화적 설정인가!
<파 프롬 헤븐>은 일본 여자 대신 우아한 백인 여성이 흑인과 사랑에 빠진다. 흑인인권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950년대 미국의 한적한 백인 마을에서 흑인은 여전히 노예의 지위에 머물러 있다. 모범적인 가정주부이자 지역사교계의 샛별인 백인 중산층 주부가 흑인 정원사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인생을 건 모험이다. 흑인 남자가 백인 여자의 손을 잡고 있는 광경을 지나가는 백인 남성이 모욕을 주면서 떼어놓는 것이 이 시대의 분위기다. 그런데도 여자는 남자와 결혼하려고 한다. 완벽한 현모양처의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 사랑을 위해 인생을 걸겠다고 나선 이 여성은 가족과 사랑을 하나로 상상하는 중년 남성의 입맛에 딱 맞는 이미지이다. 그러면 마땅히 이 여자의 상대역에 감정이입해서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봐야 할 법한데 별로 그렇지가 못했다. 나는 잠시 극중의 줄리언 무어 같은 여자랑 살면 좋겠다거나 그녀가 사는 집의 정원이 참 좋다는 파편적인 관음을 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평소 인물에 쉬이 감정이입을 하는 내 관람 습관에 비추면 사뭇 다른 체험이었는데도, 이 영화가 싫진 않았다.
이 영화는 분노의 대상을 만들지 않으면서 자족적인 사랑의 이미지를 먼발치에서 보라고 권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착한 가정주부고, 남편은 본인의 의지로 어쩔 수 없는 동성애자이고, 여자의 애인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흑인이다. 이 구도에서는 관객이 극중에 개입해서 분노의 감정을 터뜨려야 할 대상이 없다. 사랑의 장애가 되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완고한 제도밖에 없고, 이 제도는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래서 처음부터 백인 여자와 흑인 남자의 사랑은 이별이 예고돼 있고, 그렇게 과잉된 슬픔의 정조는 사라지기 직전 잠시 가장 아름다움 빛을 토해내는 단풍의 이미지를 통해 화면을 메운다. 사랑도 개인의 내면이 잠시 아름답게 물드는 단풍 같은 것이니 연장하려들지 말고 기억으로 간직하라고 감독은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이 영화가 가정하는 사랑의 관념은 마음에 들지만 화법은 미심쩍다. 달리 말하면 정서적으로는 유익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무익하거나 유해한 것 같다. 백인 여자와 흑인 남자의 사랑을 말하지만 이 영화는 그 사랑을 금하는 현실 논리에 충실한 방식으로 발언한다. 왜 두 남녀는 결혼까지 생각하는 관계인데도 키스신 한번 나오지 않는가. 언어로 흑백의 사랑을 말하고 영상으로 금하면 궁극적으로 어떤 메시지가 이길까?
백인과 남성을 중심으로 상상하는 할리우드는 답을 알고 있다. 할리우드의 관습은 흑백의 정사장면을 금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의 정사장면을 금한다. 백인의 집단 권력에 대한 흑인의 침공이기 때문이다. 그 반대는 상대적으로 관대하다. <몬스터 볼>에서의 할리 베리처럼 흑인 여성의 육체는 성적 대상으로 전시될 수 있다. 이 경우는 백인 남성의 시혜, 혹은 사소한 일탈이며 권력의 역전은 없다. 이 논법이 가정하는 것은 여성의 육체는 남성의 관리대상이라는 것이다. 화를 내야 할 사람은 흑인과 여자이다. 그러니 둘이 연대하고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논리를 내 몸은 왜 온전히 수용하지 못할까? 이게 인종간에 있게 마련인 무구한 이물감 때문인지 인종과 남녀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 때문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택일하라면 후자쪽이다.남재일/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