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은 불경기의 영향을 많이 받게 마련이다. 제법 인기를 끌었다는 작품도 막상 계산기를 두들겨보면 본전 메우기에도 바쁜 상황이다. 10년 이상 현장을 지켜온 어느 프로듀서는 처음으로, 이 상황에서도 계속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 하는지 갈등된다고 토로한다. 열정 하나만으로 버티기에 현실이란 정말 녹록지 않다.
그래서 제작사들은 위험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제작위원회’란 이름으로 모여 작품을 만든다. 일본에서 처음 시작한 제작위원회 시스템은 제작비에 대한 위험부담을 분산시키는 것과 동시에, 각자의 강점을 살리기에 적합한 시스템으로 주목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탑 블레이드>가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이번에는 CCR 게임을 원작으로 하는 한·일 합작 애니메이션 <포트리스>를 주목해야 할 차례인 듯하다. 한국에서는 SBS프로덕션과 대원C&A, 동우애니메이션, 반다이 코리아가, 일본에서는 선라이즈와 반다이가 참여한 이 작품은 이미 지난 4월부터 일본 TV도쿄에서 방영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SBS를 통해 올 여름부터 방영될 예정이라고.
원작이 한국 것인 만큼 투자비율도 한국이 높다. 제작비 70억원 중 한국은 64%, 일본은 36%를 분담하게 된다. 형식은 52부작 TV시리즈로, 제작방식은 2D애니메이션이다. <포트리스>는 모든 면에서 안정적인 구도를 이루고 있다. 남자 초등학생의 입맛에 맞는 탱크 배틀, 마케팅에 적합한 캐릭터와 메커닉, 연작 시리즈로 이어져도 무리없는 시나리오…. 신기하고 새로운 메커닉이 잔뜩 등장하는 SF세계에 멋있는 등장인물들이 종횡무진 활약하고, 마침내 평화는 지켜진다.
원작의 인기는 검증됐고, 제작비의 위험부담도 최소화한데다가 컨소시엄으로 묶인 각 회사들이 네트워크를 이용해 시장을 공략하게 되니, 걱정할 건 하나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너무 안정적이라서 모범생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오히려 문제다. 이미 정해진 공식에 맞춰 색깔만 달리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림풍은 <포켓몬스터>나 <디지몬>에서 본 것 같고, 한 소년과 포트리스 전사들이 악당과 대결하는 구도도 흔한 구도다.
그럼에도 애니메이션 <포트리스>가 기대되는 이유는 포트리스 월드가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가 중금속 원소로 되어 있는 무기물, 즉 메커닉으로 구성된 이 세계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미래적 설정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기사 제도나, 하늘에서 영웅이 떨어진다는 식의 신화적 구조가 나오지만, 인간이 있을 자리에 대신 기계만 대입하지는 않았다. 인간계에서는 돌연변이로 취급받는 주인공 소년은 기계와의 융합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 소년이 가운데 서서 온갖 종류의 생명체의 얽히고 설킨 갈등을 풀어간다.
시공의 어긋난 틈을 통해 갑자기 차원이 이동한다거나, 생체 칩 같은 걸 통해 인간이 매체 자체가 된다는, 지금이야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설정들은 사실 우리 상상력에서 먼저 나온 것임을 감안하면, <포트리스>가 제시할 세계관은 우리의 미래 모습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매체가, 기계가 사유 방식을 결정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다음에 우리는 어떤 형식으로 존재하게 될까, 어떻게 사유하게 될까, 들여다보고 싶다.
그리고 가장 큰 궁금증, 게임과 애니메이션의 차이 말인데, 그건 직접 보고 판단해보자. :-P 김일림/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illi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