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트럭 운전사였지만, 경마와 도박에 빠져 있었죠. 할머니댁 앞이 스트립 극장이었고, 어머니가 파트 타임으로 유곽청소를 하는데 저도 곧잘 따라가곤 했습니다. 동네는 절반이 철공소, 절반이 유곽이었습니다. 인더스트리얼 뮤직 같은 곳이었죠. 프레스 기계 때문인지 손가락이 없는 사람도 있었고, 옆집 아주머니는 한쪽 눈이 의안이었는데 가끔 컵에 담가두더군요. 중학교 때는 끔찍하게도 이지메를 당했고, 고등학교 때도 가장 친한 친구가 앞장서 무시하기 시작해 화장실에서 도시락을 먹기도 했습니다. 학교는 중퇴하고 속도위반으로 결혼하고 말았죠. 음악을 하던 남편은 애를 무릎에 앉혀본 적도 없고, 한번은 애를 봐달라니까 귀에 대고 기타를 친 적도 있습니다. 둘이서 정신과에 간 적도 있고, 더러워지고 싶지 않았지만 제 팔에 자해를 하기도 했죠. 결국 속여서 이혼 서류를 만들었습니다.
어쩐지 눈물 짜는 <오싱>류의 스토리를 읊어댄 듯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픽션이 아니다. 만화가 다다 유미(多田由美) 스스로의 고백이다. 자신의 비참한 과거를 심심풀이 껌처럼 툭 내뱉을 줄 아는 여자이니 그 솔직함이 어디에 가랴. 그녀의 만화도 딱 그대로다. 그런데 하얀 종이와 검은 칸으로 걸러진 그 이야기는 참 아름답다. 분명히 그녀를 죽음 근처에까지 몰고 갔을 그 고통들이 서글프지만 몇번이고 듣고픈 노래가 돼버렸다. 그래도 되는 걸까? 만화든 시든 노래든 훌륭한 것들은 항상 그렇던데 말이야. 다다 유미의 걸작 단편들이 정식으로 국내에 출판되었다. <태양 따위 뜨지 않아도 좋아> <베이비 블루 아이즈> <콜 마이 네임> <재가 될 때까지>(시공사 펴냄). 1개 1원짜리 전기 코드를 감는 부업에 지쳐 1만엔짜리 ‘성실상’을 노리고 투고를 한 것이 십수년을 지나 이렇게 쌓였다.
다다 유미의 만화는 오직 한줄에 늘어서 있다. 도시의 언저리, 인생은 망가졌고, 돈은 없고, 사랑은 찢어졌다. 뭐 한탕이라도 해볼까? 잘 안 된다. 그래, 원래 그랬잖아. 우리의 악운이 어디 가겠어? 그런데 한 가지 더. 세상 어디에서나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겠지만, 왠지 그것은 미국에서 일어나야 제격일 것 같다. 왜일까? 너무 많이 보고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겠지. 록 음악과 아메리칸 뉴 시네마에 심취한 이 만화가는 바로 그 세계를 자기 머릿속에 세트로 만들고, 자신의 인생을 투영하고 있다.
<라이크 어 허리케인>의 제시카는 자신 때문에 목장을 잃어버린 샘을 위해 은행을 턴다. <베이비 블루 아이즈>의 두 남자는 누군가 자신들의 침대에 놓아둔 아이를 고양이처럼 키우다 엄마에게 뺏긴다. <태양 따위 뜨지 않아도 좋아>의 로니는 여자친구와 도망을 가려다 그 아버지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는다. 모두 다 한번쯤 영화에서 본 듯한, 건스 앤 로지스나 롤링스톤스의 노래 가사로 들은 듯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다다 유미는 만화라는 안경으로 그 세계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정통의 소녀만화보다는 그라비아 잡지의 일러스트레이션 같은 다다의 화풍은 그 만화들을 쉽게 미국 팝 이미지의 세계로 날려보낸다. 하지만, 또 그 간결한 선과 파열적인 칸 나눔을 통해 우리는 금세 아시아 만화의 독특한 감성세계로 회귀한다. 다다의 작품들은 1980년대 일본 소녀만화에 등장한 모던한 화풍의 극단이라 할 수 있는데, 노출 과다의 사진과 같은 과도한 백색의 세계는 작품 전체에 냉소와 체념의 기조를 들이붓는다. 미국 대중잡지의 관능적인 모델들은 과도한 여백과 초점 잃은 하얀 눈동자를 통해 (딱히 일본이나 동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이국적인 세계로 빠져나가게 된다. 거기에 하나의 판타지로서 체념과 상실과 위안의 세계가 있다. 쉽게 해피엔딩으로 맺어들어가지 않고, 또 비극의 눈물샘으로 풍덩 뛰어들지도 않는 적당한 관조는 그림으로, 또 이야기로 이 단편들에 훌륭한 마침표들을 찍어간다. <태양…>의 로니는 비겁자라는 말을 듣고도 싱긋 웃으며 바를 나서고, <라이크…>의 샘과 제시카를 동경하고 질투하던 아이들은 두 사람이 형무소에서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멋지네”라고 말한다. <베이비…>의 주인공은 “엄마 고양이가 데려가버렸어”라며 미소짓는다. “그래 잘됐네.” 옆집 여자가 말한다.
‘걸작선’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만화가들의 단편선들이 줄곧 발간되고 있다. 하지만 정말 걸작선의 이름값을 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단지 과거의 단편들을 모아놓을 뿐이지, 훌륭한 비평가 혹은 편집자의 선택이 가진 의미는 커 보이지 않는다. ‘다다 유미 베스트’ 시리즈는 진짜 애정과 관심이 가득한 편집자가 정성 들여 작품을 고르고 해설을 단, 보기 힘든 진짜 ‘걸작선’이다. 이명석/ 사탕발림 운영 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