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 2>가 이제 그 기운을 다한 가운데, 여름 영화시장을 겨냥한 할리우드 대작영화의 경쟁이 달아오르는 때다. 엄청난 물량, 스케일 큰 액션, 오락에 복무하는 이야기 등 대작영화의 공식은 철저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끔 변종 같은 새로운 영화를 만난다. <헐크>와 <미녀 삼총사: 맥시멈 스피드>는 각각 할리우드 대작영화의 이단의 길과 관성적인 길을 걷고 있다.
●<미녀 삼총사: 맥시멈 스피드>
액션만 즐겨라, 내용은 따지지 말고‥
70년대 텔레비전 시리즈를 영화화한 <미녀 삼총사>(2000)는 팔·다리 늘씬한 언니들이 보여주는 컴퓨터그래픽(CG) 액션의 신선함이 있었다. 섹시한 모습은 도발적이며 여유와 유머의 기운이 있었다. 그건 이야기의 허술함을 상쇄할 만한 매력이었다.
하지만 속편격인 <미녀 삼총사: 맥시멈 스피드>에서 이제 그 신선함은 유효기간에 달한 듯하다. 액션장면 재미있다. 몽고에서부터 캘리포니아를 누비며 삼총사는 긴 다리로 차고 하늘에서 떨어지고 오토바이를 타고 신나게 산악을 가르며 더 크고, 더 빠르고, 더 화려한 액션을 선보인다. 근데 황당한 이야기 속에 액션은 일관성도 논리성도 없다. 시도 때도 없이 삽입된, 몸매를 드러내는 춤과 노래는 섹시함과 당당함을 넘나들던 전편의 아슬아슬한 선도 넘어버린다.
1편의 멤버 그대로 나탈리(캐머런 디아즈), 딜런(드루 배리무어), 알렉스(루시 리우)는 백만장자인 사설탐정 찰리의 ‘에인절’이다. 이들은 보슬리(버니 맥)의 연결로 스피커 속 찰리의 지시를 받아 몸 바쳐 사건을 해결한다. FBI의 증인 보호프로그램의 암호를 해독하는 2개의 반지를 찾는 게 이번 임무다. 전직 ‘에인절’이자 악녀로 이 영화를 위해 온갖 성형수술을 감행했다는 데미 무어가 등장한다.
미녀 삼총사의 추리력과 운동신경, 찰리에 대한 헌신감은 언제나 궁금증의 대상이다. 어떻게 사건현장만 가면 금방 추리해내 옆동네에서 범인을 찾아내는지, 어떻게 하늘에서 떨어지면 정확히 비행기 날개에 착 매달리는지, 어떻게 얼굴 한번 못 본 찰리에게 그리 희생적인지. 그러니까 따지지 말고 만화 같은 액션만을 즐길지어다, 언니들의 섹시함은 부록으로. 그 ‘막가는 맛’이 영화의 재미일 수도 있으니. 27일 개봉.
●리안 감독 <헐크>
억압적 대상에 무한의 힘 휘두르는 쾌감
1억5천만 달러를 들인 138분 상영시간의 리안 감독의 <헐크>는 독특한, 그리고 진귀한 할리우드 대작영화다. 마블 코믹스나 DC 코믹스의 주인공을 끌고 와 이렇게 인간과 사회를 이야기하는 어두운 세계를 창조한 영화는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 정도일 것이다. 고담시라는 도시의 볼거리가 있던 <배트맨>은 여기에 비하면 아기자기하게 느껴질 정도다. 순간의 정적 뒤에 따라나오는 폭발적인 액션의 대비는 헐크의 운명처럼 쓸쓸하고 선이 굵다. <결혼 피로연> <음식남녀> 등을 통해 끈질기게 가족의 관계를 파고들었던 리안 감독은, 그 고민을 헐크에게 고스란히 짊어지웠다.
1962년 시작된 만화나 77~82년 방영된 텔레비전 시리즈(<두얼굴을 가진 사나이>)와 달리, 영화의 초점은 아들과 아버지에 맞춰 있다. 데이비드 배너(닉 놀테)는 군 기지에서 유전자 변형 실험을 하던 과학자지만 정부가 인체실험을 금지하자 자신의 몸을 실험대상으로 삼는다.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고 그가 끌려간 뒤 30년, 그의 아들 브루스(에릭 바나) 역시 과학자로 성장해 있다. 어느날 감마선에 노출된 브루스는 몸 안에 있는 ‘그것’을 발견한다. 분노하면 나타나는, 너무나 특별해서 “세상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 헐크를 그의 동료이자 연인 베티(제니퍼 코널리)만이 감쌀 뿐이다.
영화 시작 50여분이 지나야 등장하는 헐크는, 미스터 아메리카 루 페릭뇨가 연기했던 텔레비전물과 달리 ILM의 컴퓨터 그래픽(CG) 기술의 창조물이다. 시속 140㎞로 달리고 지상에서 4㎞까지 뛰어오르는 거대한 초록 괴물이 우습지 않을까, 커다란 슈렉은 아닐까, 말도 우려도 많았다. 분명 그런 느낌은 있다. 역삼각형 모양의 체형, 에릭 바나의 얼굴을 비슷하게 부풀려놓은 멀끔한 생김새, 통통 튀는 느낌, 무엇보다 끝내 안 찢어지는 팬츠 등이 자꾸 신경쓰인다.
근데 대낮의 광활한 사막과 그랜드 캐년 등을 날 듯이 뛰어다니는 헐크의 액션을 보다 보면 묘한 쾌감이 든다. 날쌘 배트맨의 차나 하늘을 날아오르는 수퍼맨의 망토가 아니라, ‘몸’에서 나오는 힘은 원시적이고 강력한 매력이 있다. “가장 두려운 건 그 놈이 날 지배할 때 내 스스로가 즐긴다는 거야”라고 브루스도 말했지만, 억압적인 대상(영화에선 군)을 향해 날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힘에선 ‘자유’의 기운까지 느껴진다. 우연한 기회에 힘을 얻는 코믹스의 여타 주인공과 달리, 헐크는 자기의 아버지에 의해 어두운 운명을 타고났다. “내 한계를 극복하려 했을 뿐이야. 진실을 알 때 신의 벽을 넘을 수 있어”라 외치는 데이비드와 그 운명에 분노하는 브루스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갈등을 빚는 아버지와 아들인 동시에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괴물, 지킬과 하이드처럼 인간의 양면이기도 하다.
리안 감독은 이렇게 CG기술과 엄청난 제작비를 이용해 상상해볼 수 있는 모든 액션(심지어 헐크와 유전자조작된 개들은 나무 위에서 싸운다, <와호장룡>처럼!)을 해보되 드라마는 철저히 자기의 주제를 이야기한다. 그게 좀 심하면 아예 연극무대 같은 조명아래 아버지와 아들을 앉혀놓고 아버지가 연설을 하도록 한다. 베티만을 보면 마음이 녹아버리는 헐크는 어이없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리 닭살 돋지 않는다. 단 한번의 유머도 없는 이 오락영화를 사람들이 얼마나 ‘오락적’으로 느낄지 모르겠지만, 할리우드 코믹스 대작영화는 <헐크>로 또 한걸음 나아갔음이 분명하다. 7월4일 개봉.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