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여자’라 좋다
사실, 전지현은 ‘나쁜 여자’다. 그는 지하철에서 남자친구 따귀를 척척 때리는 ‘엽기녀’(<엽기적인 그녀>)이자, 가지 말라며 건물 난간에 매달린 남자(정우성)를 향해 “흔들리지마, 내게 사랑은 없어”라고 단호하게 얼굴을 돌리는 ‘냉정녀’다(‘2% 부족할 때 옥상편’). 그리고 “사랑을 하면서 돈이 없다는 건 참 불쌍한 일”이라며 “라면만 먹고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건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라고, “여자에겐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도 사랑이다”라고 말하는 ‘현실녀’(‘2% 부족할 때 자존심편’) 이다. 최근 20대 여성의 대표적인 성향들은 전지현을 통해 표현되면서 얄밉지 않고 솔직하게, 전세대에 어둡게 깔려져 있던 ‘착한 여자 콤플렉스’를 걷어낸다. <엽기적인 그녀>(후반의 신파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분명 있겠지만)가 제시한 전복적 여성캐릭터는 “전 아무것도 몰라요, 마음대로 하세요” 하던 수동적인 여성에 익숙해져 있던 한국 관객에게 일종의 해방감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전지현 본인에게 역시 자신의 매력이 무엇인지, 어떤 점에 대중이 열광하는지를 깨닫게 해준 절호의 기회였다.
“<엽기적인 그녀> 이후 어떤 면에서 제 자신이 ‘엽기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껴요. 말도 행동도 그전보다 많이 밝아진 것도 사실이구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다음부터 잘해야 되는데, 이제부터 더 잘해야 되는데, 이미 다 와버린 것처럼 사람들이 대하니까 부담스럽더라구요. 결국 그 역시 다 엎어버리고 싶었어요.” 그런 면에서 심령스릴러 은 여러모로 위험한 선택처럼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미술관 옆 동물원>을 통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그러면서도 긍정적인 신여성상을 보여주었던 심은하가 <텔미썸딩>의 독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듯, 전지현 역시 <엽기적인 그녀>가 주는 가벼움을 벗어던지기 위해 몸에 안 맞는 무거운 옷을 입으려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처음에 리딩할 때 박신양씨가 그랬어요. 도대체 여기 모인 사람들은 무슨 용기를 가지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지가 궁금하다구요. 저는 속으로 글쎄, 이게 그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저 역시 처음에는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나리오가 완성도가 있었고, 그게 좋아 일단 결정하고 난 이후에 저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나 이 솔직한 배우는 이 결코 자신 앞에 떡하니 차려진, 소화 잘될 음식들로만 구성된 밥상이 아니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중3 때부터 일을 시작했으니 벌써 햇수로 7년짼데, 슬럼프에 빠진 적이 지금까지는 없었어요. 그런데 아마도, 나중에 돌이켜보면 때가 슬럼프로 기억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연이란 역할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정해진, 맞춰놓은 틀 안에서 해야 하니까 벗어날 수 없었죠. 왜냐하면 제가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거라면 이렇게 보여줘도, 저렇게 조금 다르게 보여줘도, 어차피 나니까 그 안에서 여러 가지 여지가 있지만, 저를 벗어난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죠.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악이 되었다기보다는 큰 공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젠 뭐라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붙고요.” 걱정을 접으시라. 그녀의 다음 작품이 곽재용 감독의 로맨틱코미디 <바람개비>(가제)로 결정되었다는 풍문이 들려오고 그는 또다시 ‘엽기적인 여경’이 되어 우리에게 총을 들이밀 것이다.
결국, 따라잡고 싶게 만드는
배우로서 전지현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몸에 맞는 옷이었던 <엽기적인 그녀>의 성공 역시 한편에서는 ‘연기자의 공이라기보다는 캐릭터의 승리’라는 의견도 나온다. 웅얼거리거나 아예 씹어버리는 발성은 여전히 전지현에겐 숙제다. 그러나 “감독이 요구한 것에 대해 그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하나 더 보여준다”는 그의 연기방식은 아직 대중에게 알려지지 못했지만 감독들이나 현장 스탭들에게는 정평이 나 있다. 그러나 “차태현은 뒤에서 연습하고 연습 안 한 척하는 데 선수고 전지현은 생각 안 하는 척하면서 깊이 생각해오는 데 선수다”라는 곽재용 감독의 말에 전지현은 손사래를 친다. “<엽기적인 그녀> 찍을 때 저한테 가장 큰 자극제는 바로 차태현씨였어요. 시나리오 자체가 엽기적인 ‘그녀’이고 남자 시선에서 바라본 여자이니까 제 역할은 당연히 매력적일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게 태현씨는 저를 잘 받쳐주는 한편 자신도 뒤처지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하는 게 보였어요. 물론 저도 가만있을 순 없었구요.”
여전히 자기 나이에 걸맞은 천진함이 살아 있지만 동시에 7년차 배우로서 “나는 연예인이 아니라 프로페셔널한 배우”라는 자의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전지현. “매니지먼트를 통해 발탁되었고 어린 나이에 데뷔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습게 보는 것이 싫어 응석부리고 싶어도 많이 참았다”는 이 ‘속깊은 친구’는 결코 미래에 대한 불안함으로 현재를 망치지 않는다. “연기는… 어떻게 해야지 잘하는지도 모르겠고 여전히 어렵고 난해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다르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처음보다는 조금 잘하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앞으로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익어갈 거라는 기대, 스며들 것 같다는 막연한 희망이 들어요. 아무래도 인생경험이 쌓이면 조금 더 깊은 연기가 나오겠죠?”
아기의 얼굴과 소녀의 팔다리, 그리고 여인의 목선을 가진 이 배우는 아이처럼 뛰고, 소년처럼 웃으며, 사내처럼 이단옆차기를 날린다. 그렇게 ‘오! 지현’을 외치던 추종자들의 줄은 더욱 길어지고, ‘질투는 나의 힘’을 외치던 경쟁자들의 전의는 이내 상실되어, 결국 따라잡고 싶게끔 만든다. 저 눈부신 스물셋의 아름다움을, 저 파닥거리는 생명력을, 아니 지금 모습 그대로의 전지현을 박제해버리고 싶은 충동, 만약 그것을 죄라고 부른다면 당신들과 나, 우리 모두 유죄다.
오종록의 X-파일
왜 ‘全’지현이 되었는가 하면…
<첫사랑 사수 궐기 대회>로 충무로에 데뷔하는 오종록 감독과 전지현은 특별한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다. 드라마 PD 출신인 오 감독은 중학교 2학년인 우연히 손에 잡힌 전지현의 사진을 1년간 파일에 꽂아두었다. “선이 나타나지 않는 도화지 같은 아기 얼굴”에 그 당시 벌써 168cm의 키를 가진 이 기이한 소녀의 모습이 쉽게 뇌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정훈탁 이전에 전지현이란 배우의 가능성을 먼저 알아보았던” 감독은 <내 마음을 뺏어봐> <해피투게더>를 통해 이 배우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대중에게 생중계했다. “은혜를 갚아야 할 때가 됐는데…”라며 사람좋게 웃는, 오종록 감독이 털어놓는 전지현에 관한 사소하고 정감어린 X-파일.
지현이 이름
연출하는 동안, 내가 성명을 정리해준 배우는 딱 두명이다. 한재석과 전지현. 재석이는 그의 모친이 성명 철학관에서 받아온 두개의 예명 가운데 선택한 이름이고, 지현이는 그녀의 부친이 속상하지 않겠끔 내가 변성을 시켜준 경우이다. 알다시피 全씨와 田씨 玉씨 등등은 모두 다 王씨의 변성이다. 고려가 망하자 王씨들은 목숨도 건지고, 씨족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할 요량으로 王씨 위에 삿갓을 씌우고, 옆을 막고, 점을 찍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삿갓 쓴 폼이 멋있었다. 그렇게 ‘王’지현은 ‘全’지현이 되었다.
지현이 다리
나는 치마 교복 입은 여고생이 자전거 타는 장면을 좋아한다.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를 보면, 여고생들이 떼거리로 영도다리 위를 달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원조격이 <내 마음을 뺏어봐>에서 지현이 인천 홍예문을 질주하는 장면이다. 한겨울에 내리막길을 달리던 지현이가 자전거와 함께 자빠지고 말았다. “괜찮냐?” “예, 괜찮아요!” 지현이의 깨진 무릎을 본 건 그날 오후 자유공원 촬영에서였다. 그 추운 겨울에 살점이 보일 만큼 다쳤으면 꽤나 시리고 아팠을 텐데 한마디 말도 안 하고 꾹 참고 있었던 거다. 순간 이 아이가 보통 독한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물론 나 역시 호들갑 떨며 여배우 챙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어이! 누구 크림 없냐? 지현이 무릎에 크림 좀 발라줘라!…”
지현이 코
지현이 코는 중간 부분이 약간 볼록하다. 한때 지현인 이게 콤플렉스였다. 그래서 ‘수리’하고 싶어했다. “지현아! 사람이 미소를 지을 때, 입 주위의 50개가량의 근육이 동시에 움직인다고 해. 얼굴에 칼을 대면, 외관상 예쁘게 보일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이 근육들 가운데 상당 부분이 잘려 나가! 그래서 성형미인의 웃음은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그러니까 생긴 대로 살아!” 지금껏 전지현의 코는 중학교 때 전지현의 코 그대로다. 아마 그때 코를 고쳤더라면 그녀 역시 흔한 성형미인들과 비슷한 웃음을 짓고 있을는지 모른다.
지현이 심장
“감독님! 나 인기가요 DJ 먹었어요!” 기뻐서 펄펄 뛰는 그녀에게 난 길길이 화를 냈다. “당장 그만두고 와!” 모름지기 배우로서 오래 살고 싶다면 대중에게 자신의 노출빈도를 줄여야 한다. 물론 우리 역시 매스미디어의 대중이 되는 순간, 배우의 모든 걸 알고 싶어하지만 배우는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절대 노출해서 안 된다. 배우는 대부분 카메라 앞에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처절하게 외로워야 한다. 이걸 못 견디는 배우는 반드시 망한다, 고 했다. 물론 한참 자신을 내보이고 싶었을 땐데, 지현이는 결국 외로움을 택했던 것 같다. 결국 그녀는 또래의 여배우들보다 월등히 노출빈도를 줄이면서 활동했고, 그 녀석의 심장은 지금 누구보다 단단해진 것 같다.
* 추신 이 자그마한 가십들이 그녀의 프라이버시를 노출하는 글이 안 되기를!
오종록/ <첫사랑 사수 궐기 대회>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