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쉽다, 확 뒤틀린 분노를 바랐는데"
미쟝센영화제 집행위원 다섯 감독이 보는 ‘오늘의 단편영화’ 칭찬 혹은 충고
6월25일부터 30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제2회 미쟝센단편영화제 ‘장르의 상상력展’은 단편영화를 장르별로 상영하고 시상한다는 기발한 발상의 행사다. 기존 독립·단편영화 진영에서 크게 고려하지 않았던 장르라는 틀을 가져옴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효과는 두 가지다. 장르에 대한 본원적인 고민을 불러일으키고, 또 이들 장르를 제멋대로 뒤틀고 분해 및 재조합해 새로운 영화를 상상해볼 수 있다는 점 말이다. 이 행사의 또 하나의 특징은 주류·상업영화계로 진출한 충무로 감독들이 후배 감독들에게 베푸는 일종의 잔치 성격이라는 것이다. 토털 헤어패션 브랜드 ‘미쟝센’의 후원 아래 집행위원 자격으로 참여한 이들 감독들은 출품된 영화를 뽑아 상영하고 시상하는 일까지 도맡게 된다. 장르별 영화제답게 감독들이 특정 장르의 예심, 본심, 수상작 선정을 전담하는 것.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이현승 감독이 집행위원장을 맡았고 봉준호, 박찬욱(사회드라마 부문), 김대승, 송해성(멜로 부문), 김지운, 장준환(공포판타지 부문), 허진호, 김성수(코미디 부문), 오승욱, 류승완(액션스릴러 부문) 감독이 각 장르의 집행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중 5명의 감독이 한자리에 모여 지난해 행사와 올해 예심을 통해, 그리고 다른 여러 경로를 통해 접한 최근의 단편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한때 단편영화를 만들었고 충무로에 나와서도 여전히 단편영화 감독들과 비슷한 고민을 호흡하는 이들은 훌쩍 키가 자란 요즘의 단편영화에 감탄하기도 했으며, 애정어린 충고 또한 아끼지 않았다.
집행위원장 이현승 감독과 각 장르를 대표해 봉준호, 김대승, 장준환, 오승욱 감독이 함께한 이날 자리는 ‘공사다망’한 감독들의 스케줄 때문에 밤 11시30분께야 시작될 수 있었다. 시놉시스 작업 때문에 지방에 체류 중인 코미디 부문의 허진호 감독은 잠시나마 전화로 ‘화상대담’에 참여했고, 참석 예정이던 김지운 감독은 ‘대박 후유증’ 탓인지 “잠시 눈 붙이고 가겠다”는 메시지만 남긴 채 행적을 감췄다. 한편 박찬욱, 김성수, 류승완 감독은 현재 영화를 촬영 중이라, 송해성 감독은 개인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오늘의 단편영화 01 개성없고 지루한 vs 다양하고 섬세한
---이현승 영화제 본선에 오른 작품들을 아직 모두 보진 못했지만, 전반적으로 지난해에 비해 완성도는 높아진 느낌이다. 지난해에는 60점짜리도 있고 90점짜리도 있고 다양했지만, 올해는 전반적으로 80점짜리들만 죽 있는 것 같다. 대신 개성이 줄어든 느낌이라 아쉬웠다. 다들 어떻게 봤는지 궁금하다.
---봉준호 사회드라마 장르도 그렇다. 사실 사회드라마란 장르가 존재하지도 않다보니, 특정 장르에 포함되지 않는 여타의 영화들이 우르르 모여든 모양새가 됐다. 장르적인 레퍼런스가 없어서 심사기준을 세우기가 어렵다. 연출, 촬영, 조명, 편집까지 완성도에서 하자가 생겨 고꾸라진 영화들이 없어서 더 힘들다. 확실히 완성도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러나 이 장르에서 쉽게 기대할 수 있는, 과격하다거나 도발적인 시선은 드물었다. 그게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소소한 얘기들을 재미있게 잘 처리한 점은 돋보인다. 익숙한 소재를 새롭게 얘기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무지막지하게 과격한 영화가 없는 대신, 영화들이 섬세하다.
---김대승 멜로 장르도 비슷한 것 같다. 지난해보다 섭섭한 느낌이 든다. 지난해엔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작품이 많았던 것 같았는데, 올해는 완성도는 높아졌는지 몰라도 러닝타임이 길어지고 상상력이 뛰어난 작품을 만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특히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단편영화인지 단막극에 가까운 중편인지 애매하더라. 시골 남자 두명의 관계를 비추는데 동성애적인 코드도 비치고 하는 <원더풀 데이>는 좋았다. 대상에 지나치게 다가가지 않고 자기 감정에 빠지지 않았다. 불법 운전교습소의 남녀가 나와 이상한 불륜의 느낌도 던지고 하는 도 아주 좋았다. 디테일이 굉장히 좋고, 치열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얘기를 하고 있다.
---장준환 나는 올해가 처음이라 지난해와 비교할 순 없지만, 호러판타지 부문의 작품들은 다양하다고 느꼈다. 완성도도 그렇지만 매체에서도 디지털로 작업한 작품들이 여럿 있었다. 주제나 소재도 다양하다고 느꼈다. 어떤 영화들은 정말 열심히 공들여 만든 흔적이 보여서 점수를 주게 된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너무 예술지향적이거나 자기연민적인 영화들은 별로라서….
---이현승 액션스릴러는 어땠나.
---오승욱 앞서 나온 얘기들과 비슷하다. 사실 나는 액션 장르를 맘껏 즐기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어갔는데, 36편 정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이 들더라. 얘네들은 왜 아무것에도 화를 내고 있지 않나. 완전히 불균질하고, 말도 안 된다 하더라도 어느 한 신에서 완전히 폭발해서 앞서간 장면들이 일순간에 어떤 정서를 환기시켜주길 바랐는데, 그런 작품들이 없었다. 피바다가 되건 어쨌건 분노가 느껴졌으면 했다. 물론 이건 내 취향이긴 하다. (웃음) 어쨌든 날 환장하게 만드는 영화들이 없었다.
---이현승 사실 선배들의 장편영화가 그런 작품을 많이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라도 단편영화들이 성장하고 확장되는 낌새를 보여주는 건 없었나?
---오승욱 액션장편영화에도 좋은 작품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지 않나. <와호장룡>, 이소룡의 영화들, 김영빈 감독의 영화라든가. 그 정도 영화들의 분노를 기대했던 거다. 이 영화제의 가장 좋은 점이 장르를 이용해서 장르를 뒤집는 상상력을 인정한다는 것이고, 그런 의도가 이 장르에서 가장 잘 드러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소룡 영화와 <호소자>의 컨셉을 가져와서, 1cm라도 좋으니 자기 식대로 뒤틀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어떤 영화는 시작부터 액션의 합까지 성룡 영화와 똑같게 만드니 어쩌란 거냐. 아, 분노가 치밀더라.
---장준환 그랬나? 공포판타지에는 굉장히 섬세한 작품이 몇 있었다. 자기 안의 얘기지만 심리와 연관된 미세한 선을 따라가는 영화들이었다.
오늘의 단편영화 02
칙칙한 과거 영화 VS 치열함 없는 요즘 영화
---김대승 그런 섬세하단 면에서 걱정되는 점도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나온 이후로 비슷한 영화들이 많아졌다. (모두 웃음 + 적극적 동조)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는 것까진 좋은데, 마치 그것이 다인 것처럼 보여준다. 그 이상이 없다. 그건 장점도 되고 단점도 된다. 아무튼 홍상수, 허진호 감독과 비슷한 느낌의 영화들이 많다. 근데 그건 내 취향이 아니어서…. (모두 웃음)
---오승욱 감독들이 다 자기 취향으로 가는 것 같다.
---이현승 그게 이 영화제다. 평론가, 교수, 뭐 이렇게 여러 분야에서 골고루 심사위원들을 뽑으면, 굉장히 독특하고 매혹적인 영화들보다는 두루두루 무난하게 좋은 작품들이 상을 받게 마련이다. 이 영화제는 그런 면에서 아주 독단적이고 편파적으로 가보자는 거다.
---오승욱 그래서 더 아쉬운 거다. 누가 뭐라 해도 목숨걸고 난 이거다, 할 만한 그런 영화들이 사실은 좀 많았으면 했는데….
---봉준호 예전 우리가 단편 만들던 때는 목숨을 건 게 의도, 주제의식 같은 것이었잖나.
---이현승 아, 그래서 옛날 해외영화제 가면 한국 단편은 불가리아나 폴란드와 동급이었다. 무겁고 어둡고. 지난번 칸에 갔을 때 프랑스나 영국 같은 서구 단편들 보니까 유머가 강하고 가볍더라. 주제의식은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런 면에서 보자면 요즘 우리 단편영화들은 굉장히 여유로워진 것 같다. 목적의식보다 영화적인 유희, 영화적 표현에 더 다가가지 않나.
---김대승 그건 사회적 경향하고도 관련있는 것 같다. 지금은 분노할 일이 사실 없는 거다. 증오할 대상은 분명히 있는데, 더 교묘하게 가려지고 숨겨져서 그런 거 같다. 그리고 그런 걸 애써 파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다.
---봉준호 어쨌건, 요즘 단편은 우리 때보다 훨씬 잘 찍는다. 세대 대 세대로 보자면, 나와 장준환이 영화아카데미 다니던 94년에 동기들이 만들었던 것과 지금 작품들을 비교해보면, 기술적인 측면뿐 아니라 마인드나 영화적 감수성에서도 게임이 안 된다.
---오승욱 잘 찍었다는 건 분명히 공감한다. 나만 해도 그 당시 말도 안 되는 엄숙주의와 만들어진 죄책감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지금은 그런 게 없다는 게 좋긴 하다.
---장준환 하지만 치열한 게 없는 건 사실이다.
왼쪽부터 <무떼>,
---오승욱 그래서 젊은 감독들에게 따져 묻고 싶다. 너희들은 고민도 없냐? 있으면 왜 드러내지도 않고, 드러내도 그걸 푸는 방식이 왜 그렇게 쉽냐? 장르의 관습이 나쁜 건 아니다. 그것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서 뒤엎거나 진화시켜야 하는 것인데, 장르의 관습에 단순히 기대기만 해서 10년, 20년 전에 만들었던 영화들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건 직무유기고 게으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소룡 영화를 자기 정서화해서 불어터진 자장면이 돼 나오더라도 자기만의 것을 만들길 원하는 건데, 너무 게으르게 만드니까 심지어 표절 같기도 하다. 그런 데서 화가 난다.
오늘의 단편영화 03
배우의 영화 VS 실험적 영화
---이현승 화만 내지 말고…. 그럼 인상적인 영화는 없었나.
---봉준호 우선, 내가 본 영화 중에 <여기가 끝이다>라고 탈북자 얘기를 다룬 작품이 있다. 주제를 굉장히 심플하게 전하는 영화다. 남한으로 건너온 탈북자가 어떻게 해보려다가 나중에 삐끼도 되고 그런다는 건데, 무엇보다도 탈북자로 나온 배우가 신기하더라. 처음 보는 사람인데 진짜 탈북자 같더라. 말투나 피부, 생김새까지 정말 리얼하다. 언제 한번 꼭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로 치면 <계절의 끝>이라는 작품도 인상적이었다. 젊은 부부가 등장하는데 남자도 이상하고 여자도 이상하다,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아무튼 두 사람의 연기톤이 아주 리얼하고 괴상하다. 배우 얘기 하니까 떠오르는데, 이얼씨가 출연하는 <얼음비행기>, <살인의 추억>의 ‘언덕녀’ 서영화씨가 나오는 <휴가>, 기주봉 선생이 택시기사로 나오는 <택시기사, 택시를 타다>처럼 연극배우들이 나온 영화가 있더라.
---김대승 배우가 만든 영화도 있지 않냐. 유지태가 만든 <자전거 소년> 말이다. 여자아이를 짝사랑하는 남자애가 있는데 폼을 잔뜩 잡고 고백하러 가는데, 정작 말도 한 마디 못 붙이고 욕만 하고 돌아선다는 얘기다. 좋은데 좀 길다. 40분이 넘는다. 아무래도 허진호 감독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모두 웃음)
봉준호/ 꽤 실험적인 구성도 있었다. <Super Morse>가 있는데, 영화가 좀 이상하다. 시작부터 죽 스틸사진만으로 찍은 영화인데, 마지막 부분에 활동사진으로 바뀐다. 사실, 상황이나 내용은 아주 익숙한 풍경, 그러니까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한 게 계속 진행돼서 뭔가 싶은데, 마지막에 활동사진으로 바뀔 때는 아주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사회드라마와 애니메이션이 어울리지 않을 법도 한데, <인생>이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은 완성도, 비주얼, 여운도 있고 굉장히 좋았다. 의외로 생각하게 하는 면이 있었다. 지난해의 <베이비토피아>도 그렇고, 올해도 몇편의 애니메이션을 봤는데, 극영화보다 오히려 주제의식이 명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대승 <사이에 두고>라는 영화가 있는데 시한부 인생인 부인과 남편이 나온다. 그런데 처음엔 너무 관념적이지 않나 했다. 거울을 써서 심리상태를 표현하기도 하고… 아주 지겹다 싶을 정도인데, 뒷부분까지 가니까 그게 아예 스타일화돼서 차라리 신선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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