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환 나도 실험성 있는 영화를 봤는데, <기억, 발꿈치를 들다>라고. 한 여자가 2차대전 중 한 일본 군인이 보낸 소포를 현재 시점에 받는 이야기인데, 월경이라는 것의 의미도 부각되고 해서 좀 어려운 단편이었지만 완성도나 이미지가 모두 좋았다. 그리고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란 영화도 있는데, 아주 평범한 영화처럼 시작해서 갈수록 골때리는 상황에 빠진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내러티브 전개와 상상력을 갖춘 것 같다. 굉장한 반전도 있고.
---봉준호 그걸 만든 감독이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으로 지난해 미쟝센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신재인 감독이다. 언제든 충무로에 나올 수 있는….
---장준환 그런가? (흥행에) 망한 감독 입장에서 조금만 자제하시면 좋을 듯…. (모두 웃음) <난청지역>이란 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얘기 같기도 하다. 남편에게 폭력을 당한 어떤 여자가 자기 딸을 괴롭히는 남자애를 자기 집 방 안에다 감금하고 폭력을 가한다. 아이의 몸에 쇠사슬 묶은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특히 좋았고…. (모두 웃음)
---일동 <지구를 지켜라!>를 만든 장 감독으로선 아주 좋았겠지.
오늘의 단편영화 04
너무 못 만든 영화 vs 너무 잘 만든 영화
---이현승 액션쪽에선 재미있는 영화가 없었나.
---오승욱 기절할 정도로 좋았던 영화가 있다. <무떼>라고, 고등학생들이 만든 작품인데 이상하게 개인적으로 애착이 갔다. 사실, 지탄을 받을 만큼 영화가 길고, 정말 아무 개념없이 찍었지만, 너무 좋았다. 이소룡을 추종하고 실제로 무술도 조금 할 줄 아는 아이가 만든 건데, 자기가 무술을 하면서 생각한 것들을 디지털카메라로 나름대로의 컷을 운용해 보여준다. 관절기술도 나오고 대단하다. 특이한 점은 여기에 어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거다. 폭력학교가 배경인데 아이들이 다스리고, 어른은 있다 해도 힘이 없다. 그리고 <호소자>부터 시작해서 홍콩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무술 캐릭터들이 다 나온다. 이 영화가 매력적인 가장 큰 이유는 유희의 느낌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무술 좋아하는 고등학생들이 모여서 우리 영화 찍자, 네가 악당해, 이렇게 시시덕거리면서 만든 것 같다. 정말 좋아하는 것들을 다 쏟아부어서 놀이하는 기분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만듦새는 정말 엉성했지만 영화라면 그래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이현승 제2의 류승완이 나오는 건 아닐까.
---장준환 그럴 수도 있겠다. 류승완 감독도 진짜 첫 단편영화는 만듦새가 엉성했으니까. (웃음)
---봉준호 류 감독 첫 영화인데, 준환이가 촬영하고 내가 편집한 이상한 영화가 하나 있다. <변질헤드>라고. 류 감독이 감독의 생명을 걸고 절대로 공개할 수 없다고 하는 영화다. 여기저기 나돌던 필름까지 다 회수했다더라.
---김대승 나도 정말 반가웠던 영화가 있다. <쥐구멍은 어디 있나>인데, 주인공이 성격도 그렇고 해서 남들 앞에 잘 나서지 못하는 여자인데, 어느 날부터 <지구를 지켜라!>처럼 머리에 이상한 걸 쓰고, 옷도 이상한 걸 입어 변신을 하면서 자신감을 갖게 된다. 굉장히 엉뚱하고 기발한 상상력이더라. 낯 뜨거워서 잘 못할 것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그렇게 반갑더라. 사실 완성도는 떨어져도 나는 좋았다.
---오승욱 <바람은 얼굴에 찔리운다>란 영화가 있다. 제한된 공간 안에서 밑도 끝도 없이 두 사람이 격투를 벌이는 모습이 펼쳐지는데, 시도가 놀랍더라. 과감하더라. 사실은 완성도로 보면 좀 많이 떨어지긴 한다. 그래도 격투장면만을 통해서 감정까지 끌어내겠다는 의도가 좋았다.
---장준환 나는 <빨간 모자>!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은데, 완성도가 너무 떨어져 아쉽다. 같은 이름의 동화를 원작을 바탕으로 판타지도 있고 우리 현실에 관한 이야기도 있는 이야기로 바꾼 것도 신선했다. 빨간색을 너무 좋아하는 여자아이와 빨간색 모자로 그 아이를 꼬시는 남자의 관계가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마지막 부분에 내러티브가 잘 전달이 안 되는데, 거기의 엽기적인 장면이 좋았다. 남자 손톱에 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줄 알고 아이가 다가가는데, 그게 알고 보면 손톱에 칠한 게 아니라… 흐윽…. (모두 긴장) 그게 손톱이 빠진데다가… 그런 거더라. (모두 어우∼ 한다. 어디선가 “죽인다” 소리 들린다) 하여튼 캐릭터도 좋고 소재도 신선해서 좋았다.
---이현승 반면 너무 잘 만든 영화들도 있지 않았나.
---오승욱 <갈치괴담>이란 영화가 있다. 그런데 이게 너무 잘 만들었다. 무성영화라는 구성이나 액션의 만듦새 이런 게 너무 뛰어나서 의심마저 가더라. 내가 아는 사람도 얼핏 비치는 것 같고. 이게 인육을 먹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그래도 굉장히 좋게 봤다. 너무 배고파서 사람을 잡아먹기까지를 굉장히 설득력 있게 보여주더라. 마지막 부분에 사람 눈깔을 파서 입으로 후루룩~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휴. (모두 웃음)
---장준환 <알버트>란 영화도 너무 잘 만들었다. 외국에서 공부하는 분이 만든 것 같은데, 하여튼 완성도가 굉장히 뛰어나다. 30년 세월 동안 교수형 당한 시체를 닦는, 염을 하는 사람의 얘기인데, 이게 아주 묘하다. 처음엔 무슨 공포영화처럼 시작한다. 인상도 더러운 아저씨가 시체를 닦는 것도 모자라, 이까지 뽑더라. 그걸 왜 뽑지? 하여튼 무서웠다. 그런데 뒷부분으로 가면서 아주 짧은 순간에 그 아저씨가 가진 슬픔의 판타지로 확 넘어가더라. 그 부분이 너무 좋았다. 이 영화도 너무 잘 만들어서 솔직히 의심의 눈길이 갈 정도였다.
---이현승 지금 허진호 감독과 통화가 연결됐다.
---허진호 <신동양 수-퍼맨>은 일단 연기 연출이 괜찮더라. 슈퍼맨 옷을 입은 사람이 나와 우왕좌왕하면서도,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름대로 풀어놓아서 마음에 들었다. <꽃시절>도 재밌었다. 아버지와 함께 살던 아이가 학교에 무단결석한 다음 엉겹결에 아버지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는데 조의금까지 받는다. 공돈으로 여자친구와 뭘 하려는데 일이 자꾸 꼬인다. 그런 상황이 너무 재밌었다.
오늘의 단편영화 05
디지털 VS 필름
---이현승 단편영화들을 보면서 어떤 경향을 발견했나.
---장준환 디지털이 인상적이었다. 디지털이라는 매체가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김대승 디지털에는 분명 장점이 있다. 예를 들면 인공조명 안 써도 되고. 그런데 그런 장점들을 활용한 것이라기보다는 장편의 호흡을 따라가지만 이야기에선 특별히 남겨지는 것이 없으니까 길게만 느껴진다.
---장준환 맞다. 디지털이 필름의 텍스트를 흉내내려고 했던 건 아쉬운 점이다.
---이현승 이번에 개막작이 해외 초청작인데, 이라는 이름으로 5분 미만 단편 11편을 상영하는데, 상당히 재미있다. 단편의 짧은 맛, 반전 등이 눈에 띈다. 외국에서는 그렇게 정말 짧은 단편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상당히 고무적이고 부럽다. 우리나라에서는 5분 미만 작품은 아마 만들 생각도 안 할 거다.
---봉준호 지난해 영화제에 나온 <My Sweet Record>가 기억난다. 옛날 짝사랑했던 남자를 찾아간 감독이 그와 옛날을 생각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영화였는데, 시간도 짧고 굉장히 사적인 느낌이어서 디지털이라는 매체와 적합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현승 그걸 갖고 허진호 감독이 엄청 고민했었지. 좋긴 좋은데 상을 주기에는 좀 약소해 보이고 해서.
---봉준호 며칠 전에 청소년영상제 일로 어떤 부탁을 받고 EBS 방송사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영화를 만든 친구들이 모두 청소년들이라 돈도 없고 해서 90% 이상이 디지털로 찍은 작품들이었다. 그중 몇 작품은 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자기 집에서 엄마에 관해 찍는 식이었다. 오히려 그런 게 생동감이 넘쳤다.
왼쪽부터 <꽃시절><빨간모자>
---이현승 학교에서 가르치면서도 느낀다. 돈 안 들이고 길게 찍을 수 있으니까 학생들이 굳이 필름 작업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3학년부터는 무조건 필름으로 찍으라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디지털이란 매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가볍고 사적이며 부담없이 구사할 수 있다는 것 등이 디지털의 특성인데, 필름은 정교하게 한번씩 텐션을 가지고 숏을 찍어야 한다. 그런 필름의 특성을 훈련하지 못해서 디지털로 찍으면서도 마냥 늘어지는 속성이 있는 거다.
---김대승 앞으로 시간제한이 필요한 거 같다. 30분 정도로.
---이현승 호주에는 ‘1분영화제’라는 재미있는 행사가 있다, 1분이 넘으면 안 되는 게 규정이다. 딱 하룻동안 열리는데, 저녁 때부터 날 샐 때까지 1분짜리 영화들을 계속해서 상영한다. 쉬지도 않고.
---오승욱 사실, 이 영화제도 좀 재미가 있다. 좀 이상한 영화를 찍는 감독의 경우, 딴 데서는 어렵지만 이곳에선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다는 거다.
---이현승 후원기업인 미쟝센도 칭찬해줘야 한다. 사실 후원한 쪽은 늘 콩내놔라 팥내놔라 하면서 개입하게 마련인데, 여기는 우리가 알아서 끌고가게 한다. 다른 기업들도 마인드를 갖고 영화를 포함한 문화를 위해 힘써야 한다. 정리 문석 ssoony@hani.co.kr, 박혜명 na_mee@hani.co.kr사진 이혜정 socapi@hani.co.kr·편집 심은하 eunhas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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