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한국 만화가 화려하게 피어나던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에 찬, 약간은 시기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던 한국 만화의 발화는 만화, 더 나아가 문화의 패러다임 전환과 함께했다. 한국사회에 이미지 언어가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 시기였으며, 흑과 백의 대결적 취향에서 다채로운 게릴라적 취향으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1995년을 한국 만화 발화의 정점을 만든 행사가 있었으니, 그것은 정부 주도로 개최된 SICAF(당시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였다. 페스티벌이라기보다는 화려한 대중 엑스포에 가까웠던(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첫 번째 SICAF에는 몇개의 기획전시가 개최되었는데, ‘신세대관’에서 ‘피어오르는 9인전’이라는 젊은 작가전이 열렸다. 최호철, 명, 박상선, 최민호, 유승하, 오영진, 박정훈, 이지미, 박형동 모두 9명의 작가였다. 상당수가 미술을 전공한 이들은 평면과 입체를 아우르며 만화의 새로운 가능을 보여주었다.
8년의 스펙트럼
그로부터 8년이 흐른 2003년 6월, 최민호의 첫 번째 작품집 (새만화책 펴냄)이 출판되었다. 잠재된 가능성, 만화에 대한 열정, 새로운 대안의 모색, 시도와 도전 등 여러 수사로 설명이 가능한 8년의 세월이겠지만 너무나 만화를 그리고 싶은 작가에게 그 시간은 길고 지루했을 것이다. 아무튼 8년 만에 마주한 최민호의 작품을 단박에 읽어내려갔다. 8년 전쯤 보았던 것 같은, 그래서 아직도 최민호라는 작가의 특정한 스타일로 기억되는 작품에서 매우 일상적이고 소소한 사건이지만, 전문적인 식견을 통해 보여주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스토리보드를 활용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한권의 작품집이지만 꽤 다양한 스펙트럼을 담아내고 있었다.
이 작품집에는 크게 3개의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하나는 <종점의 시작>과 <할아버지와 적산가옥>에서 보여주는 ‘흑백 드로잉’이라는 동아시아적 만화 문법에 충실한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공교롭게도 역사와 마주한 인간의 내상에 대해 주목하는데, 광주항쟁에 진압군으로 참여한 사람과 우리나라로 귀화한 일본인 화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섬세한 펜의 풍부함으로 표현한다. 작가 스스로 <만화광장> <만화시대>의 영향을 받았다고 표현한, <만화광장> 시대(지금이 아니라)의 오세영과 이희재가 보여준 단편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두 번째 묶음은 <회귀본능> <Yellow Submarine> <그놈과 그년의 대화> <만선>이 있다. 대대적으로 컬러를 도입했고, 애니메이션과 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을 보여준다.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면, 1999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입학했는데 만화와 영상의 대화, 풍부한 그래픽 중심의 만화, 애니메이션에 대한 주목 등은 학교를 다니면서, 애니메이션과 영상작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번째 묶음은 대부분 작가의 최근작이다. 하지만 하나의 묶음 안에서 4개의 작품이 각각 독특한 개성을 보여준다. 특히 애니메이션 스토리보드를 고정 프레임으로 만화작업에 접목시킨 <그놈과 그년의 대화>는 흥미로웠다.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가 ‘스토리보드’형 예술이라는 점에서, 스토리보드를 만화의 형식으로 끌어들인 시도는 어색하지 않았다. 가장 흥미롭게 본 작품은 작품 중간에 스케치풍으로 삽입된 만화 <애어>(愛漁)였다.
즐거운 취미생활
<애어>는 작가의 말을 빌리면, “즐거운 취미생활에 대한 이야기”다. 연습장 종이에 쓱 스케치한 것과 같은 형식은 특별한 효과를 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일상적인 스케치 속에서 만화가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의 압박을 피해 수족관에 도착한 순간 작가는 어린애가 되어버리는데, 그 어린애들과 수족관 주인의 대화, 그리고 온갖 종류의 물고기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밑그림 없이, 고치지 않고, 스케치하듯 자신의 일상을 담아낸 만화는 프랑스나 미국의 젊은 작가들에게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얼터너티브한 만화의 스타일이다. 이런 만화는 만화를 하나의 허구적인 이야기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는 매력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이면서 시작된다. 인터넷 공간을 통해 일기만화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소소한 일상의 단면을 드러낸 만화들이 인기를 얻는 것과 함께 스케치하듯 단번에 자신의 경험을 드러낸 최민호의 <애어>는 만화에 대한 전통적 접근에서 벗어나(약간의 강박증과 피해의식에서도 벗어나) 새롭게 만화를 발견하고, 만화를 활용하는 모습이다.
프랑스의 젊은 작가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아소시아시옹이란 출판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출판사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만화를 출판하고 있다. 트롱하임(우리나라에는 트롱댕이라는 이름으로 어린이 만화책이 번역되어 있다)이나 스파, 다비드 베와 같은 작가들은 자신이 그리고 싶은 만화, 일상적이면서도 자전적인 작품들을 펴내고 있다. 최민호의 <애어>는 동시대 유럽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 맥락이 닿아 있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작품집은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의 제작지원공모를 통해 완성되었다. 앞으로 더 좋은, 더 새로운 만화들이 여러 지원사업을 통해 배출되기를 기원한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