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되는 소리!
한동안 나는 이른바 ‘처세술’에 관한 책들을 탐독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철없는 어린 시절에는 나 역시 처세술책 읽는 사람을 바보이거나, 천박한 속물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밑줄그으며 중요 문장을 달달 외우고 밤이면 곰인형 대신 책을 껴안고 자는 ‘처세술’ 신도가 된 것이다. 그때 내가 봤던 책들은 대충 이런 제목이었다. <나쁜 여자가 성공한다> <노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 노를 못해서 후회하는 사람> <화나면 흥분하는 사람, 화날수록 침착한 사람> 등등등. 뭔가 감이 오지 않는가? 처세술책에 대한 나의 태도가 왜 180도 변했는지. 그렇다. 문제는 성질 죽이기였던 것이다.
믿을 수 없겠지만 적어도 직장생활에서 나는 너무 착한 그녀로 살아왔다. 일하다가 엉뚱한 유탄을 맞아도 절대로 ‘노’라고 말 못하고 그저 네네, 아무리 물 좋은 조직이라도 한두명 있게 마련인 똥파리가 앵앵거리며 괴롭혀도 그저 침묵. 그러고는 혼자서 한심하게도 멋진 대사까지 만들어가며 ‘그때 이렇게 한방 먹였어야 하는데…’. 이미 버스 지나간 상황을 시뮬레이션하거나 술병을 붙잡고는 친구에게 “아 뭐 그런 놈이 다 있냐고… 아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이냐고…”주정을 해댔다.
알고 보니 ‘성질 죽이기’가 아니라 ‘성질 살리기’에 관한 영화인 <성질 죽이기>의 데이브도 그런 인간이다. 절대로 ‘노’라고 말 못하고 상사의 뒤치다꺼리를 다하며 자신의 노력이 모두 다른 사람의 공으로 넘어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고 학벌 좋고 물건 좋은 애인의 옛 남자친구가 끊임없이 주변을 맴돌며 앵앵거려도 그저 허허실실이다. 과연 그는 틱낫한 스님의 <화>를 온몸으로 흡수한 듯 부처님 같은 미소로 세상을 사는 인물이다. 이 상황에서 미치는 건 그가 아니라 그의 애인 린다다. 참으로 앞길이 캄캄한 애인을 각성시키기 위한 린다의 ‘음모’ 아래 벌어지는 사건들로 영화는 채워진다.
그런데 이 영화는 숙맥인 한 인간이 성질있는 인간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유쾌하게 보여준다는 야심보다 더 거창한 야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데이브과에 속하는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관객의 성질을 바로 세워주겠다는 야심 말이다. 처음부터 영화는 말도 안 되는 과장의 설정으로 관객의 비윗장을 긁는다. 비행기에서 데이브는 깡패 같은 어떤 사람에게 자리를 빼앗긴다. 아무리 코미디라도 말 되는가? 미국 비행기의 승객 자리는 언제부터 지정좌석제가 아니라 선착순제로 바뀌었는가. 헤드셋을 가져다 달라는 데이브의 요구를 무시하다가, “나라망신” 운운하다가 체포에 이르게 하는 승무원의 행동은 또 어떤가. 성질 죽이기 모임의 동료들이 떠는 주접이야 이해하고 넘어간다고 해도 세번이나 등장하는 법정장면은 또 무엇인가. 미국은 돈만 주면 모든 걸 할 수 있는 나라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장치인가.
이 모든 게 다 데이브의 성질을 돋우기 위해 마련된 시나리오라는데, 영화를 보고나니 궁금해진다. 분명히 린다는 성질관리 전문가인 버디 박사에게 돈을 주고 프로그램을 부탁했을 텐데 멀쩡히 가던 비행기를 세우고, 법원까지 세번이나 빌리는 데 진행비는 얼마나 들었을까? 적어도 억대 이상의 돈이 들었을 텐데 그럼 린다는 억만장자로 등장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이따위 시나리오를 쓴 작가라면 “린다가 초등학교 선생으로 일하지만 실은 억만장자예요. 비트겐슈타인처럼 말이죠.” 터진 입으로 대답은 잘할 것 같다. 한술 더 떠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모르셨어요? 이 영화는 판타지영화예요. 촌스럽게 개연성 따위를 걸고 넘어지다니….”
실로 황당하게 진행되다가 드러나는 마지막의 황당한, 그러나 뻔한 반전에서 영화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빙신아 아직까지 자리에 앉아 있었냐?” “니가 그러니까 평소에 무시당하고 사는 거야.” 성질 같아서는 앉아 있던 의자를 뜯어내 스크린에 내던지고 상영관에 수류탄을 던지며 액션영화의 주인공처럼 붕 날아서 도망치고 싶었으나 절대로 ‘노’라고 못하는 성격 탓에 “영화 재미있게 보셨어요?”묻는 극장직원의 과잉친절에 “네, 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극장을 나와야 했다.
데이브처럼 돈 많은(것이 틀림없는) 애인을 두지 못한 탓에, 비행기를 세우고 법정에 출두해본 적이 없는 까닭에 나는 여전히 성질 죽이고 살고 있다. 가끔씩 똥을 튀기는 똥파리의 앵앵거림에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따위의 게으른 자기변명을 하면서. 그러나 나, 더이상 몇년 전처럼 알코올릭 월드로 도피하거나 조상 탓을 하지도 않는다. 나라는 인간은 이렇게 살다가 죽을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역시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건 성질 죽이기나 성질 살리기가 아니라 주제파악이다. 김은형/<한겨레>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