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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 기자의 반<매트릭스2>론에 대한 반론
심영섭(평론가) 2003-06-21

거대한 의문부호 진화 중인 속편

“매트릭스가 뭐야?” 1999년 5월8일, 시청 앞 극장 씨넥스의 빨간 의자에 앉아 초짜 영화평론가로 달달 떨며 <매트릭스>란 영화를 보았던 나는 약간 머리가 혼란스러운 상태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영화는 만화에서 본 정지동작을 캡처해 액션의 신천지를 보여주는가 하면, 네오가 빌딩을 뛰어넘거나 정지된 총알이 우르르 떨어지는 장면은 슈퍼맨보다 더 비현실적어서 대체 이걸 믿을 관객이 있을까 싶었다. 게다가 영화는 오리지널 없는 오리지널의 혼성모방을 질펀히도 펼쳐놓았다. 여주인공 트리티니는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의 이미지를 그대로 이식했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신약성서를 비빔밥한 이야기하며, 무엇보다도 매트릭스가 반전이야 꿈이야 사이버 세계야라고 자문해보니 극장 천장은 빙빙 돌고 있는 것 같았다.

4년이 지난 2003년, 나는 1999년 구보씨와 <매트릭스> 논쟁을 벌였던 때를 기억하며 <매트릭스1>과 연관된 자료를 다시 읽어본다. 구보씨는 장르를 구분하자면 잡동사니이고 특수효과로 액션영화나 만들면서 뭐 그렇게 힘을 주냐고 한탄 또 한탄이다. 심영섭은 구보씨가 유희정신을 모른다며 <매트릭스>는 미국 문화의 중층에서 올라온 진짜라고 핏대를 올린다. 이 외에 주간지, 일간지 할 것 없이 <매트릭스>의 리뷰 내용의 절반 이상은 <매트릭스>가 무엇을 베꼈는가, 일본과 홍콩을 언급하는 데 할애하였는데 막상 <매트릭스>의 진정한 가치, 이 영화가 혁신한 블록버스터의 이야기구조, 끊임없이 반사되는 이미지 속에서 드러나는 분열증적인 주체에 대한 사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시공간과 가시거리의 한계를 돌파한 <매트릭스>의 황홀한 액션의 유혹 등에 대한 언급은 보이질 않는다. <매트릭스>의 개봉. 1999년 여름, <키노>는 아직 살아 있었고 <필름2.0>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스타워즈 에피소드1>과 <이재수의 난>이 개봉했던 그해 여름 말이다.

더욱더 거대한 ‘우주’를 꿈꾸다

405호에 실린 김소희씨의 ‘1편의 선의마저 의심스럽게 만들어버린 <매트릭스2>’의 영화읽기는 4년 전 나를 포함한 많은 평자가 그러하듯 <매트릭스>의 개봉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시간의 찻잔 속에서 <매트릭스>라는 폭풍의 외곽지대를 빙빙 돌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게 만든다. 그녀의 논점은 <매트릭스2>와 <매트릭스1>은 외형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는 매우 다른 영화라는 데 모아지고 있다. 그녀는 그 이유로 <매트릭스2>에는 기독교-시오니즘이 내러티브 전체를 좌우할 정도로 전면화되어 있고, 디지털 시대 인간 주체의 정체성을 질문했던 <공각기동대>의 사유 대신 할리우드영화에서 무수히 봐왔던 선악이분법이 재현되고 있다는 점을 내세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복제인간 스미스에 대한 그녀의 해석이다. 스미스의 역할은 기독교에서 ‘악마’를 규정하는 방식과 동일하며, 모든 것을 “나”라고 부르는 스미스는 기독교적인 선악의 이분법의 적용을 받는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김소희의 반론은 <매트릭스2>가 캐릭터나 이야기의 구조를 기독교-시오니즘이란 틀 내에 의존한 전형적인 할리우드의 ‘못 만든 속편’이라는 것이었다.

대체 웬 시오니즘? <매트릭스1>의 가장 큰 전제가 ‘스푼은 없다’였다면, <매트릭스2>의 가장 큰 포인트는 역설적으로 ‘포인트는 없다’이다. ‘스푼은 없어요. 그러면 숟가락 대신 자신이 휘죠.’ 1편에서 오라클을 만나러 간 네오가 어른 동승에게서 선사받은 이 불교스런 화두는 <매트릭스2>에 이르러서는 시온의 기계 앞에서 하몬 대의원이 네오에게 하사한 또 다른 <매트릭스>의 화두이다. 하몬 의원의 지적처럼 <매트릭스2>는 확실히 포인트가 없이 더욱더 모호해졌다. 1편에서 엄연한 악당이었던 스미스는 오히려 ‘나’라는 인식이 생긴 인간스런 면모를 지니고, 유일의 구세주였던 네오는 반대로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싸움 기계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네오의 꿈으로 시작된 영화는 네오가 매트릭스의 꿈을 꾸는 것인지 매트릭스가 네오의 꿈을 꾸는지조자 석연치 않게 끝이 난다.

뿐만 아니라 <매트릭스2>에 등장하는 악당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철학을 늘어놓는데 의미심장하게도 그 핵심은 모두 인과론적인 세계관으로 모아진다. 스미스는 네오에게 자신은 자유를 얻었다며 ‘우린 목적없이 태어날 수 없다. 목적은 존재의 이유’라고 주장하고, 메로빈지언은 최음제를 먹인 여자에게서 ‘세상은 인과의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결정론적인 세계관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확신에 찬 악당들과 달리, 자신의 믿음을 굳게 믿었던 모피어스는 이제 ‘내가 꿈을 꾸었도다’라며 혼돈의 발 아래 무릎을 꿇는다.

그것이다. <매트릭스>의 몽환성, <매트릭스>가 부정하는 결정론적 세계관, <매트릭스>가 뛰어넘으려는 서양의 인과론적인 세계관은 김소희의 주장과 달리, <매트릭스2>가 이루어낸 가장 큰 성취가 자기 부정에 있음을, 오히려 <매트릭스1>이 견지했던 기독교적인 혹은 할리우드의 이분법적인 선과 악의 방식을 뒤바꾸어놓는 데 있음을 드러낸다. <매트릭스2>는 바야흐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인 인과론의 세계, 그 부동의 세계를 훌쩍 뛰어넘으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매트릭스란 ‘세계’를 창조하는 데 공을 들였던 1편과 달리, 2편이 더욱더 거대한 ‘우주’를 꿈꾸고 있음을, 기계와 인간의 이분법적인 사고조차 모호해지는 미래, 혼돈과 무와 꿈이 삼위일체가 되어버린 우주의 가락에 덩실덩실 춤추는 몸짓이 느껴지는 것이다.

또 다른 미래를 예언한다

그렇다면 김소희씨의 말대로 ‘시온’의 집회장면은 진정 <매트릭스2>의 시오니즘적 성격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인가? 그녀의 지적대로 시온은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6)가 제시했던 공간 컨셉들을 충실하게 계승한 측면이 없지 않다(다른 무수한 SF영화들처럼). 그러나 천길 낭떠러지 같은 지하에서 층층이 사람들이 모여사는 이곳은 인간을 에너지원 삼아 층층이 사람들을 포개놓았던 <매트릭스1>의 스펙터클과 오히려 거울상처럼 보이는 곳이다. 폐허가 된 지구가 인간 전지로 이루어진 바벨탑으로 변모했다면, 시온은 오히려 살아 있는 인간이 바글바글한 디오니소스적인 축제 장소인 것이다. 이러한 대비를 통해 워쇼스키 형제는 매트릭스의 세상이 갖지 못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모피어스가 대중에게 했던 연설은 로마 사극을 연상케 하는 선동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오히려 어떤 ‘이즘’보다는 그 옛날 <왕중왕> 같은 영화에서 보았던 로마 사극의 방대한 시각적 조감도를 확보하려는 워쇼스키 형제의 욕망이 엿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혼음난교를 벌이는 이곳은 약에 취한 듯 그러나 매트릭스 속 공간이 주는 빠름 대신 느린 기어를 단 생명력이 넘치는 곳이다. 자신이 한때 기계였음을 표지하는 상처를 달고 네오와 트리티니가 ‘인간 되기 한판’ 같은 섹스를 벌일 수 있게 되는 곳.

그래서 <매트릭스2>가 전해주는 메시지는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굳이 개념화하자면 오히려 불교적인, 도교적인 무위론에 가깝고, 다른 한 예술 하는 많은 영화들이 그러하듯 매우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듯도 보인다. 김소희씨는 소스에 이르는‘마지막 문’과 열쇠 그리고 쏟아져나오는 눈부신 빛 등을 통해 이 모두가 기독교의 고전적인 상징 개념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매트릭스의 전사들이 자기들끼리는 휴대폰으로 통화하면서도 굳이 매트릭스를 빠져나갈 때 구식 전화기를 사용하는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매트릭스1>에서 구사했던 이미지 핵심은 반사였다. 컴퓨터 스크린으로 네오와 악당의 안경에 반사된 이미지는 네가 누구인지 생각하지 말고, 알려고 하라(Don’t think you are, know you are)는 주체의 문제를 인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그러나 2편에 와서 <매트릭스>는 ‘행동하라’고 말한다. 1편이 보여준 반사의 이미지는 2편에 와서는 어느덧 겹겹이 쌓인 문과 열쇠의 이미지로 변모한 것이다. 키메이커, 말 그대로 구식의 열쇠를 줄줄이 달고 있는 이 사람이 네오에겐 필요하다. 문 저편의 세계는 열기 전에는 모르는 것이고, 설사 전혀 엉뚱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또 다른 문으로 들어가 결국 나를 만들어낸 소스와 대면해야 한다. 근원과 대면하는 일. 그러나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순전히 구식의 열쇠, 구식의 전화처럼 아날로그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 과연 이러한 <매트릭스>의 일갈이 사이버 세상을 사는 우리와 아무런 끈도 없는 허접이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감히 <매트릭스2>가 허접한 신화학이 아니라, 진화 중인 속편이라고 말하고 싶다. 슬라보예 지젝은 ‘<매트릭스>는 철학자의 잉크반점 검사’라고 했었다. 나는 <매트릭스>를 ‘디지털 시대의 카산드라’라고 말하고 싶다. 속편이든 전편이든 <매트릭스>는 늘 예언적이다. 1999년, 일개 블록버스터였던 <매트릭스>는 다른 어떤 철학자보다 더 손위운 방식으로 사이버 세계의 공허함, 벤처의 이름으로 다가온 테크로 크랫의 도래 그리고 섹시하면서도 강인한 새로운 여성상의 등장을 예언하는 카산드라의 목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이제 <매트릭스2>는 인간과 기계가 지워지는 또 다른 미래를 예언한다. 그것은 시오니즘 차원에서 머무르는 선동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매트릭스를 무너뜨리는 자기 부정의 과감함, 속편의 규칙과 영화 마케팅의 규칙과 패션과 철학을 바꾼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하는 영화 <매트릭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은 당신 앞에 놓여진 매트릭스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되묻는 거대한 의문부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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