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16인이 밝힌 '나를 매혹시킨 영화' 16편
영화의 매혹은 때때로 너무 지나쳐 보는 이의 취향, 이데올로기, 노선, 철학을 보잘것없게 만들곤 한다. 스크린 위로 퍼지는 빛의 포자가 일단 뇌리에 진득이 달라붙기 시작하면 감성은 이성을 배반하고, 흥분은 지성을 지배하며, 쾌락은 도덕을 압도한다. 객관적으로야 대단할 게 없지만, 정말 사소한 이유 때문에 마력을 발휘하는, 이런 영화들은 이율배반의 긴장을 동반한다.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는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터.
영화가 뿜어내는 강렬한 섬광에 눈이 멀어버리는 건 감독들도 마찬가지다. 인간관계의 내밀한 구석을 추적하는 박기용 감독은 <돌아온 외팔이>의 왕우에게 홀딱 반했고, 코미디의 대가 장항준 감독은 영국서 날아온 삼류 멜로영화에 눈물을 쏟았다. 굵은 선의 남성영화가 트레이드 마크인 김성수 감독은 ‘호스티스영화’ <벌레먹은 장미>에 충격받았고, <색즉시공>은 섬세한 감성의 민규동 감독의 성장선에 자극을 줬다. 그리고 ‘쌈마이 코미디’의 대가 김상진 감독은 빔 벤더스의 시적 영상에서 영화를 발견했다니….
한국을 대표하는 16인의 감독이 자신이 추구하는 영화세계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그들 마음 한구석에서 묘한 즐거움을 선사한 영화들에 대한 애정을, 드디어 고백했다. 이름하여 감독들의 ‘나 홀로 사랑한 영화’, 또는 커밍아웃. - 편집자편집 권은주
곽 경 택 - <친구> <챔피언> 감독
거세된 남자 사이로 보이는 감독의 힘
<내시>
1986년 | 감독 이두용 | 출연 안성기, 이미숙
그때 <내시>가 상영되던 극장으로 들어간 건 우연이었다. 대학 1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당시 부산 극장가에 나갔을 때 시간대가 맞고 표가 남은 것은 <내시>밖에 없었다. 결국 무슨 영화인지도 모른 채 ‘눈물을 머금고’ 극장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한때 사랑했던 여인이 후궁으로 들어가자 그녀를 따라 내시로 입궐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에선 안성기가 주인공 내시 역할을 맡았고, 남궁원이 내시들의 대장인 내시감으로, 길용우가 왕으로 나왔으며, 이미숙, 김진아도 출연했다. 이 영화는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는데, 우선 영화의 템포가 엄청나게 빨랐다. 한 장면 안에서 기승전결을 다 보여주느라 축축 늘어졌던 당시의 한국영화와 달리 이 영화의 편집 리듬은 굉장히 가벼웠다. 내시끼리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내시감이 방문을 열고 뛰어들어오는 장면이 바로 이어지는 식으로 이야기는 순발력이 있었다. 영화에 대해 별 관심이 없던 내 눈에도 또렷하게 남았을 정도였으니까.
<내시>는 내시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도 뒤집는다. 특히 남궁원은 간사한 목소리로 허리를 구부리고 다니지 않고, 그 특유의 굵은 목소리와 뛰어난 무공을 보여준다. 왕을 최측근에서 모셔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저렇게 무술을 잘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인형을 감싸안으며 왕에 대한 경호 훈련을 받던 내시들을 남궁원이 몽둥이로 때리자, 안성기가 머리로 남궁원을 치받는 장면이나 거세당하면서 울부짖는 내시의 모습 등 한 장면 한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내시들의 바지를 벗기고 ‘검사’를 하는 장면에서 고등학생들이 엑스트라로 동원됐다는 뒷이야기도 머릿속에 남아 있을 정도다.
그때 이후로 나는 <내시>를 비디오로 한번 봤고, <친구>를 끝내고 잠시 사극을 고민할 때 영상자료원에서 프린트를 텔레시네로 떠 몇 장면을 참조한 적도 있다. 어찌보면 이 영화는 굉장히 전형적인 영화며 당시 유행하던 코드들을 뒤섞은 작품에 불과하다. 나 또한 이 영화를 ‘떡치는’ 영화라 기대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내시>는 내게 영화감독이라는 지위를 인식하게 한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뒤에 있는 감독이, 힘있고 템포 빠른 영화를 만드는 이두용 감독이 처음으로 내 눈에 보였던 것이다. <내시>는 나의 뇌리 속으로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열심히 ‘뻠뿌질’해준 영화인지도 모른다.
천사가 꾸는 꿈, 인간이 되는 꿈
1993 | 감독 빔 벤더스 | 출연 브루노 간츠, 솔베이그 도마르틴
천사 다미엘과 카시엘은 베를린의 하늘에서 사람들을 살펴보고 기록하는 임무가 있었다. 다미엘은 그렇게 베를린 시민들 사이에서, 때론 그들의 마음도 어루만지며 그냥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다미엘은 서커스에서 가짜 날개를 달고 공중곡예를 하는 여인을 발견하곤 깊은 연민과 사랑을 시작한다. 이 여인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천사’ 같은 인간 마리온이었다. 천사 다미엘은 천사였다가 인간으로 환생한 영화배우 피터 포크를 만나게 되고, 결국 다미엘은 천사로서의 생명을 끝내고 한 인간으로서 마리온을 찾아간다.
이것은 <베를린 천사의 시>라는 빔 벤더스 작품의 간략한 줄거리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천사가 인간이 된다는 것과 덧붙여 천사였다가 인간으로 환생한 영화배우 피터 포크를 만난다는 설정 때문이다. 엄숙하고 진지하기만 할 것 같은 이 영화에서 갑자기 나타난 피터 포크를 보는 순간의 반가움과 그 발상의 기발함이란 눈앞에서 별이 반짝이는 느낌이었다.
사실 이 영화를 처음 보게 된 건 막 영화를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어서였다. 동숭아트센터에서 하는 시사회를 보러 갔는데 독일어 대사에 프랑스어 자막이었다. 그러니 내용에 충실하기보다는 영상과 느낌만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영화가 가진 심오한 이야기는 나중에 한글자막을 보고 알게 되었지만…).
그렇지만 느낌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베를린 장벽, 시민, 기념탑, 문, 낙서 이런 것들이 풍겨오는 것에서 천사인 주인공이 왜 불멸을 포기하고 그 속의 인간이 되려고 하려는지…. 물론 내 자신이 전쟁에 대한 심오한 사상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고 구원하고 싶어하는 천사의 느낌만큼은 가슴에 와닿는 것 같았다. 이소룡의 영화들, <영웅본색>, 그리고 수많은 할리우드영화들을 보고 영화감독의 꿈을 꾸었던 내가 이 영화를 보며 ‘아, 영화를 통해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구나!’라고 깨닫는 순간이었다.
덧붙여 언젠가 베를린에 가볼 기회가 생긴다면 영화 속에 나오는 그 수많은 전쟁의 상처가 깃든 곳들을 꼭 가봐야지 하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까지 수차례에 걸친 유럽 여행과 출장을 갔으면서도 아직 베를린을 못 간 이유는 왜일까? 그 영화 속 모습들이 현대적 모습으로 바꿔지지 않고 보존되어 있기를 희망할 뿐이다. 언제가는 베를린에 꼭 가볼 결심을 새삼 확인하며….
에이젠슈타인이 다 뭐냐!
<벌레먹은 장미>
1982년 | 감독 정회철 | 출연 정윤희, 이영하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1982년인가 83년이었다.
저녁에 TV를 켜면 늘 미디엄바스트숏으로 전두환 대통령이 나왔고, 미래에 대한 전망은 그냥 깜깜했고, 앞으로 무얼 하며 살지 답답했다. 대체 나란 인간은 어느 분야에 재능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가망없는 청춘이었다. 주체할 수 없이 남아도는 시간을 죽이는 데는 술먹고 꼬장부리거나 동시상영하는 변두리 극장을 찾는 게 최선이었다(그때까지 영화를 만든다거나 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조차 없었다).
군입대를 얼마 앞두고 학내 연극에 흠뻑 빠져 있던 그 무렵, 과 동기인 세명의 단짝 친구들과 함께 화양리 동부극장에서 한국영화 <벌레먹은 장미>를 봤다. 스토리도 가물가물하지만 웬일인지 몇몇 시퀀스는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대학원생 이영하를 뒷바라지하는 착한 술집아가씨 정윤희는 작은 아파트에서 여동생(친동생은 아니었지 아마)과 함께 살았는데, 이영하와 정윤희가 그 짓을 할 때면 여동생은 어김없이 벽에 난 구멍(평상시엔 <펜트하우스>의 성기모양 립스틱이 그려진 종이로 가려져 있음)으로 훔쳐보며 자위행위를 했다. <해피엔드>만큼이나 그 당시로선 무척 충격적인 영상이었다. 바로 그 장면 중간에 뜬금없이 대로변에서 복개공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육교가 뒤로 보이는) 이어서 건장한 남자가 굴착기로 땅을 뚫는 장면이 클로즈업되고 그 요란한 진동소리와 함께 훔쳐보는 장면으로 다시 되돌아온다. 후반부에 이영하가 정윤희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차 안에서 정사를 벌이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핸드브레이크가 풀려 강으로 빠져 죽는, 착한 술집여급을 배반한 기회주의자의 인과응보를 그토록 자극적으로 묘사하다니…. 우린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셋은 썰렁한 극장 안에서 쉬지 않고 소란스럽게 떠들었다. 비아냥거리는 투로 낄낄댔지만 사실은 한국영화도 진짜 꼴X게 만든다는 사실에 흥분했던 것 같다. 함께 영화를 본 두 친구(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유하와 MBC의 안판석 감독)는 몇년 뒤 같이 영화서클을 만들었고, 이른바 고상한 유럽영화를 안주 삼아 떠들다가도 이따금 <벌레먹은 장미>를 떠올리곤 했다. 격동의 80년대 초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론에 필적할 만한 한국영화가 있었노라고! 한국영화 보는 걸 부끄러워하던 그 시절, 외국영화만 화제로 삼던 그 무렵 <벌레먹은 장미>는 혈기방장한 우리를 흥분시킨 걸작이었다!!
김 용 균 - <와니와 준하> 감독
링 위는 지옥이다. 외롭고 추운
<지옥의 링>
1987년 | 감독 장영일 | 출연 조상구, 전세영, 신성일
나는 가끔 뒤지게 얻어맞는 꿈을 꾼다. 아무 이유도 없다. 날 때리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다. 길 가다가도 누군가 다짜고짜 퍽치기를 할 것 같아 움찔 놀라곤 한다. 왜 그런 망상에 사로잡히나 생각해봤다. 지은 죄가 특별히 많거나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약간의 정신병이겠거니 여기기로 했다. 아무튼 나는 맞는 게 죽기보다 싫다. 나는 사람을 때리는 것도 싫다. 아마도 사람을 때리는 일이 생긴다면 맞기 싫어서 일 것이다.
고등학교 때 키 크고 힘센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동네 극장 앞에서 평소 그 친구를 경계하던 무리들과 맞닥뜨렸다. 녀석들 중 하나가 시비를 걸더니 다짜고짜 선빵을 날렸다. 기습적으로 얼굴을 가격당한 친구는 상대의 멱살을 잡고 버티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내 친구를 에워쌌다. 나는 녀석들에게 덤비지 않았다. 점잖게 타일렀다. 친구는 녀석들에게 둘러싸여 외롭게 얻어터지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덤벼들지 않았고 극장 앞이라 말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싸움은 일단락되었다. 그뒤 오래도록 나는 부끄러웠고 후회스러웠다. 까짓 좀 맞으면 어때서 친구가 맞는 꼴을 보고만 있었다니.
그 무렵 나는 이현세와 허영만의 만화를 즐겨봤다. 주인공 까치와 강토의 공통점은 깡말랐지만 열정적이고 의지력이 강한 인간이면서도 한편 너무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어 결국 무너지고 마는 비극적 영웅이라는 것이다. 내 취미는 까치의 눈빛 만들기, 목표는 강토의 몸 만들기였다. 현재 나는 살은 뺐지만 배는 볼록 나왔고 눈빛은 술 먹어서 뻘겋기만 하다. 까치는커녕 토끼눈이 됐다.
이현세 만화를 원작으로 한 <지옥의 링>을 나는 고3 때 봤다. 진주 고향집을 가출한 뒤 무작정 서울로 왔는데 고작 영화라니. 하지만 링 위에 고독하게 서 있는 심정이던 내게 이 영화는 절실했다. 영화적으로야 허술하기 짝이 없었지만, 세상이라는 링 위에 선다는 것은 지옥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임을 보여준 까치의 눈빛은 여전히 절절하다. 맞는 건 누구나 두렵다. 맞는 데 이골이 난 사람들도 여전히 맞는 건 두렵다. 하지만 괜찮다. 자꾸 맞다보면 그것도 쾌감이 생긴다. 문제는 두려움이다. 그걸 이겨내야 한다. 비록 죽더라도 그게 뭐 대수인가? 열심히 싸웠으면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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