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 영 주 - <낮은 목소리> <밀애> 감독
그녀들의 살아남기
<노는 계집: 창>
1997년 | 감독 임권택 | 출연 신은경
결국 편견과 지레짐작이 우리를 오해하게 만든다. 언젠가 우디 앨런의 아름다운 뮤지컬영화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의 시사회에서 옆에 앉은 친구와 ‘우히히 우와와’를 연발하며 끝내 노래하고야마는 줄리아 로버츠를 경배하며 나오던 행복한 그 순간, “변… 영… 주… 감독님도 이런 영화 보러 다니세요?”라고 하던 어떤 남학생의 경우처럼 말이다. 도대체 <낮은 목소리> 삼부작을 만드는 사람은 여섯 살 때 오가와 신스케의 영화를 보고 주먹을 불끈 쥐며 자신의 진로를 결정했을 거란 말이냐? 누군가는 ‘어머나’ 하고 놀라지만 나와 친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당근(^^) <오스틴 파워>의 숭배자임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스타워즈>의 새로운 시리즈에 실망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엔 의심이 없어야 한다’라며 신도들의 방황을 마음 아파하고 있으며, 어찌되었건 재키의 애크러배트 예술행위는 개봉날 즐겨야 한다고 믿고 있는 편이다.
언제였더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뒤풀이 장소에서였던 것 같다. 내 옆에 모여 앉은 언니들이 임권택 감독님의 <노는 계집: 창>에 대해 분노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반여성주의적인 영화라고 울분을 토하던 그녀들을 뒤로 하고 나는 조용히 짐을 챙겨 그곳을 빠져나오며 마음속으로 한마디를 했었다. ‘나 그 영화 좋아한다….’ <낮은 목소리>를 만들며 만나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중엔 일본군 장교와의 로맨스를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계신 분들이 종종 있다. 그리고 난 그분들의 로맨스를 들을 때마다 그 어떤 할머니들의 증언보다 뼈가 시리도록 마음이 아프곤 했다.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할머니들의 생존의 의지를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역시 여성은 매매춘이란 없어. 모든 게 사랑이쥐’라고 주장하는 쥐뿔도 없는 쓰레기 남성우월주의자들에게 종종 이용당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살아야 한다’라고 다짐하는 순간의 열정을 언제나 사랑하고 있다. <노는 계집: 창>에서 영은(신은경)이 포주와의 질펀한 정사를 하던 어느 순간의 눈빛에서 난 할머니들을 느꼈던 것이다.
깊은 어둠, 짙은 공포
Pitch Black | 2000년 | 감독 데이비드 투오히 | 출연 빈 디젤, 라다 미첼
엉겁결에 보게 된 영화였다. 만나기로 한 후배가 갑자기 늦어지는 바람에 시간이나 때울 겸, 멀티플렉스로 들어갔다. ‘<에일리언 2020>이라니 제목 참 허접하군… <에이리언> 아류작쯤 되나보다’라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감독, 배우들 자막이 나오는데 죄다 처음 보는 이름이다. 시작부터 하품이 쩌∼억 하고 나오는데… 문득, 벌어진 입이 채 다물어지기도 전에 영화에 몰입되기 시작한다. 인물들이 생생해지고 긴장감이 조여온다. 근육질의 흑인 주인공도 점점 더 멋있게 느껴진다(지금은 <트리플X> 주인공으로 잘 나가는 빈 디젤도 그때는 무명이었다). ‘후까시 잡는’ 캐릭터를 죽도록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이 흑인 주인공의 똥폼은 왠지 귀여운 구석이 있다. 그러나 여러 장점들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건 이 영화의 기본 설정 또는 핵심 아이디어다. 사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혹성에 불시착한 사람들이 우여곡절 끝에 혹성을 탈출하는 스토리.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괴물들이 빛을 싫어해서 어둠 속에서만 활동하며 사람을 습격한다는 것. 어찌보면 싱겁고 단순한 이 설정은, 그러나 동시에, 매우 효과적이고 영화적인 컨셉이다. 우선 괴물들이 어둠 속에서만 움직이기 때문에 괴물이 안 보이는 장면들이 많아서 특수효과 비용이 대폭 절감된다. 대신 감독은 공들인 상황묘사와 심리연출, 사운드 효과 등으로 괴물이 안 보이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긴장감을 유지한다. 주인공들은 괴물 이전에 어둠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것이다. 결국 ‘칠흑 같은 어둠’(즉 Pitch Black, 이 영화의 원제)이 공포를 유발하며 서스펜스의 폭과 깊이가 확장된다. 스튜디오가 만든 고무상어가 워낙 조악하여, 헤엄치는 상어의 시점화면으로 긴장감을 만들어낸 <죠스> 당시의 스필버그처럼, 산업적인 제약이 오히려 참신한 영화적 돌파구를 탄생시킨 경우랄까. 어쨌든 ‘빛과 어둠’이 생(生)과 사(死)를 결정짓는 설정이 원초적, 영화적인데 거기에 감독의 준수한 연출력이 더해지자 볼 만한 영화 한편이 탄생한다. 물론 이 영화가 빼어난 걸작은 아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떼돈을 쏟아붓고 존 트래볼타도 개망신을 당한 <배틀 필드> 같은 메이저 대작 쓰레기 SF보다는 훨씬 괜찮다는 사실이다. 제목의 허접함에 이 영화를 피해갔던 모든 분들, 비디오와 DVD로 한번쯤 즐겨보시라.
송 일 곤 - <꽃섬> 감독
5x7짜리, 그녀의 푸른 등
<천녀유혼>
1987년 | 감독 정소동 | 출연 장국영, 왕조현
고등학생 시절 쉬는 시간에 왕조현의 사진을 팔던 아이가 있었다. 나는 그 아이로부터 500원을 주고 그 사진을 샀다. 왕조현이 천사 같은 옷을 입고 늘씬한 다리를 걷고 물 위를 걷는 장면으로 기억한다. 극장에서 상영 중인 <천녀유혼>을 직접 찍은 조악한 사진이었기 때문에 푸른색 톤의 사진은 포커스가 잘 맞지 않았지만 내겐 모든 것이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왕조현, <천녀유혼>의 귀신. 청순가련의 대명사. 87년 혹은 88년 고딩들의 마음과 혼을 빼앗아가버린 미녀 귀신. 당시 영동시장 변의 유일한 동시상영관인 강남극장에서는 <영웅본색>을 비롯해 <천녀유혼> 등의 홍콩영화와 함께, <어우동> 신드롬 이후의 사극에로물의 전성시대였다. 당시 우리 고딩들의 욕망은 여인의 육체였고, 그 육체를 탐미할 수 있는 매체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왜? 인터넷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동시상영관은 ‘우리들의 천국’이었다. 그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왕조현과 장국영의 키스신이었다. 그 영화가 잘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장국영을 사랑한 귀신 왕조현이 아버지에게 들켜서는 목숨을 보전치 못하는 장국영을 물속에 집어넣어 감추고 키스하는 장면이었다. 왕조현의 목욕장면이었고, 왕조현의 등이 보이는 장면이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녀의 벗은 등! 당시 우리에게 왕조현의 벗은 등은 깨지 말아야 할 꿈이었고, 대학교 입학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었으며, 첫사랑의 두근거림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입시를 위해 새벽 두시까지 학교에서 도서관으로 도대체 뭘 위해 이 빛나는 청춘을 국·영·수에 허비하는지 몰라 방황하며 동시상영관을 들락거리던 시절, 왕조현의 <천녀유혼>은 일탈의 순간이었다. 지금 그 500원짜리 왕조현의 사진은 잃어버렸지만, 기억난다. 왕조현이 아슬하게 물 위를 날았던 혹은 걸었던 파란색의 5 x 7사이즈, 순간의 이미지 속의 세계. 그 세계는 아마도, 내가 당시 영화감독이 되길 꿈꾸던 마음의 작은 불씨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장 준 환 - <지구를 지켜라!> 감독
그 훔쳐보기의 짜릿한 기억
<나인 하프 위크>
9 1/2 Weeks | 1986년 | 감독 에이드리언 라인 | 출연 미키 루크, 킴 베이싱어
중학교 때였다. 이미 그 영화에 대한 소문은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영화가 너무 야해서 전주 시내 최초로 입구에서 주민등록증 검사를 한다는 뉴스는 이제 막 2차 성징이 시작된 아이들의 호기심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단짝 친구와 극장가 오락실로 향하던 나에게 그 녹슨 철문이 보였다. 그 문으로 극장에 들어가다 붙잡힌 아이들은 간판 그리는 아저씨가 옷을 벗기고 고추에 페인트를 바른다는 둥 온몸에 페인트를 바른 어떤 아이는 피부가 숨을 못 쉬어서 숨을 거뒀다는 둥 별별 해괴한 괴소문으로 유명한, 하필 그 극장의 뒷문이, 너무나도 당당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아찔한 망설임을 정리하기도 전에 문을 향해 뛰어가는 친구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안 돼!”를 외치며 친구를 잡으러 뛰어갔다. 정말 친구를 잡기 위해서였는데…. 어느새 나는 극장의 어둠 안에 들어와 있었다.
영화는 이미 상영 중이었다. 불안한 더듬거림으로 어둠에 적응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킴 베이싱어…. 눈부시게 흩어진 황금의 머리카락, 묘한 매력을 내뿜던 중성적인 턱선, 그 신비하고 깊어 보이는 눈빛….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불안한 심박 수는 더욱더 상승했다.
영화는 곧 기대했던 민망한 장면들로 이어졌다. 슬라이드를 보던 베이싱어가 갑자기 이상한 눈빛이 되더니 슬라이드가 막 넘어가는 장면(혹시 내가 <지구를 지켜라!>를 슬라이드로 시작한 건 이 영화의 영향이었을까? -,.-;;), 그 유명한 냉장고 앞에서의 엽기 음식 쇼, 미키 루크의 커다란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변태적 노예놀이, 쏟아지는 역광의 빗속에서 나누었던 두 연인의 너무나 관능적인 정사….
그랬다. <나인 하프 위크>라는 영화는 그야말로 백주대낮에 아이들이 절대로 보아서는 안 되는 그런 ‘나쁜 영화’였던 것이다. 영화는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충격적이었고 아마도 그때 충격이 나의 이상성격을 형성하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악마의 유혹 같던 극장의 녹슨 철문과 훔쳐보기의 가슴 떨림…. 그리고 거기서 보았던, 감당하기 힘들었지만 너무도 아름다웠던 영화…. 그 짜릿했던 영화적 체험이 요즘엔 가끔씩…. 간절히 그리워진다.
음… 요즘 극장들도 어딘가에 뒷문이 있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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