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왔다, 너의 배꼽에 똥침 놓으러

미스터 빈 혹은 로완 앳킨슨, 그의 생과 유머학

실은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첩보원이 온다. 미스터 빈. 어떤 직업, 어떤 이름, 어떤 상황에서도 그는 무조건 미스터 빈이다. 그에게서 채플린의 재림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자니 잉글리시>로 한국의 여름극장가를 똥침 놓을 이 위대한 코미디언의 숨은 이야기.

뇌쇄적인 미모의 여인에게 다가서는 턱시도의 남자. 자신을 비밀요원 001이라고 소개하고, 느끼한 시선과 멘트를 교환한다. 쿡쿡쿡.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웃음소리들. 상황 자체는 코믹할 게 없는데, 제임스 본드식 느끼함이 화면 속 남자에겐 부자연스럽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는 다름 아닌 미스터 빈이다. 천연 라텍스가 부럽지 않은 탄력적인 얼굴로 의식의 흐름을 생중계하고, 기형적으로 길게 솟아나온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며 허둥대던 그가, 언제나 크고 작은 소동의 중심에 있던 사고뭉치 멍청이가, 국가의 중차대한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요원이 됐다니, 이런 황당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 영화 <자니 잉글리쉬>는 그러니까, 미스터 빈이라는 아이콘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도 흥미로울 수도 없었을 영화다.

로완 앳킨슨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미스터 빈은 다 안다. 14년 동안 십수개의 에피소드와 극장용 장편으로 뻗어나간 <미스터 빈>은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배우들을 갈아치운 <배트맨>이나 시리즈와 달리, 로완 앳킨슨이라는 배우만을 고집했다. 신기한 것은 이 배우의 장악력이다. 그가 맡은 배역의 이름은 대부분 작품의 제목이 되고, 당연히 작품은 그의 캐릭터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버스터 키튼과 찰리 채플린처럼, 무성의 슬랩스틱 연기에 능한 로완 앳킨슨의 개성은 순진무구한 동심과 결합한 뻔뻔한 개인주의다. 그런 그가 어떻게 대중의 영웅이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대중은 어떻게 그의 개성을 흡수한 것일까. 이미 영국 최고의 수출 상품이 된 코믹 아이콘, 로완 앳킨슨은 해독하기 수월하고도 까다로운 몇 가지 모순을 안고 있다.

백치 vs 천재

늙수그레한 중년의 나이에 곰돌이 인형과 만화 이불로 잠을 청하는 남자. 주차 공간이 없으면 남의 차를 밀어내면 그만이고, 신기한 게 있으면 뭐든 장난감 삼아 갖고 놀아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 거울만 보면 좋아라 하면서, 그것이 욕실 거울이든 경찰서 취조실 유리창이든 개의치 않고 신나게 춤추는 남자. 때로 자신을 방해하는 자에 대해선 집요하게 (물론 유치하게) 응징하는 남자.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끼어든 일은 뭐든 (본의 아니게 그리고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엉망진창으로 망치고 마는 남자. 미스터 빈이 상징하는 로완 앳킨슨의 이미지는 영락없는 백치다. 빈은 오직 자신의 욕구와 충동에 솔직할 뿐, 세상 돌아가는 형국이나 자신이 벌인 일들의 파장 따위엔 관심도 없고 영문도 모른다. 그의 잠재의식은 아무것도 검열할 줄 모른다. 그런 그에게 정상적인 사회생활은 불가능해 보이며, 그와 그의 세계는 남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로완 앳킨슨의 이러한 이미지는 극장판 <빈>이나 <쟈니 잉글리쉬>를 거쳐 조금씩 어른스럽게 성숙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긴 했지만, ‘덜떨어진 사회 부적응자’라는 캐릭터의 일관성까지 흔들지는 않았다. 빈이 미국의 미술관에 파견될 수 있었던 건 해고 유예 결정일 뿐이었고, 쟈니 잉글리쉬가 첩보원이 될 수 있었던 건 영국의 모든 비밀 요원이 사고로 몰살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어떻게든 사건을 마무리짓게 되는 것을 단순히 ‘인복’ 또는 ‘천운’으로 치부하긴 힘들다. 특히 <빈>에서 자신이 침을 튀겨 망친 명화 <휘슬러의 어머니>를 깜찍한 방법으로 복구(위조)하는 과정은 미국의 속물주의에 맞서 유아적 상상력과 선의가 승리를 거둔 감동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백치와 천재는 종이 한장 차이라고 했던가. 영화는 빈에게 이런 찬사까지 바친다. “당신, 정말 천재군요.”

이건 물론 자연인 로완 왓킨슨에게 더 어울리는 말이다. 그가 영국 총리인 토니 블레어와 나란히 명문 공립학교를 다녔고, 옥스퍼드대에서 전기 공학을 전공한 수재였다는 얘긴 접어두기로 하자. 그보단 백치를 연기한다는 것, 그를 통해 사람들을 웃길 수 있다는 것은,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라는 데 주목해야 할 것이다. 로완 앳킨슨이 내세우는 자신의 유일한 장점은 바로 ‘직관’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웃게 만들 수 있는지, 그의 본능과 직관은 알고 있다는 얘기다.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노팅 힐> 등의 작가로 유명한 리처드 커티스는 대학 때 처음 만난 로완 앳킨슨을 이렇게 회상한다. “연극 모임에 매번 나오면서 한번도 입을 열지 않던 소극적인 아이였다. 어느 날 그 애가 마임하는 걸 봤는데, 입이 떡 벌어지더라. 그는 천재였다.” 1977년 에든버러페스티벌에서 만난 로완 앳킨슨에게 훗날 그의 출세작이 된 TV시리즈들을 맡긴 프로듀서 존 로이드 역시 첫눈에 그가 “채플린보다 더 유명해질 재목”임을 확신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로완 앳킨슨의 다른 얼굴, 다른 작품들‥1

<블랙 애더1>의 어설픈 야심가(1983)

영국 역사의 가장 황당한 순간들을 한 인물과 그의 주변 인물에 투사한(혹은 떠넘긴) 풍자코미디 <블랙 애더>의 첫 번째 시리즈에서 로완 앳킨슨은 리처드 3세의 조카이자 리처드 4세의 아들인 에드먼드로 등장한다. 리처드 커티스와 함께 각본을 쓴 그는 시대극 특유의 문어적이고 긴 대사를 소화하고 있는데, ‘자칭 악당’의 어설픈 헛소동에는 훗날 <미스터 빈>에서 극대화된 백치 이미지가 어른거린다.

주제가가 흐르면, 근사한 고성을 배경으로 흑마를 달리는 <블랙 애더>의 히어로 로완 앳킨슨이 등장한다. 클로즈업으로 보여진 바가지 머리의 그는 어설픈 악당의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리곤 달리던 말에서 떨어지는 민망한 광경이 연출된다. 그처럼 에드먼드는 덜 떨어진 왕족이자 야심가다. ‘블랙 애더’(black adder: 흑살모사- 애초 에드먼드는 자신의 이름을 블랙 베지터블로 짓겠다고 우겼다)는 실수로 삼촌인 리처드 3세를 죽인 뒤, 진정 위대한 악당이 되기 위해 스스로 지은 이름. 어설프기 짝이 없는 전략들이 먹혀들 리 없고, 에드먼드는 ’제 꾀에 제가 속아넘어가’ 불운과 불행을 자초하고 만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블랙 애더는 왕위도, 아버지의 사랑도 얻어낼 것처럼 보인다. 죽다 살아난 그의 침상에서 아버지 리처드 3세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다. “(감동한 아들) 아버지, 절 에드먼드라고 부르셨군요.” “(침통한 아버지) 미안하구나, 에드가.” 다음 순간, 왕실 모두가 어이없는 사고로 독살당한다. 이제 왕이 될 사람은 블랙 애더뿐. 그러나 블랙 애더가 누군가. 그에겐 절대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다.

로완 앳킨슨의 다른 얼굴, 다른 작품들‥2

<블랙 애더2>의 냉소적인 불운아(1986)

블랙 애더는 ‘죽어야 사는 남자’다. 매 시리즈에서 그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지만, 그 덕에 다음 시리즈에서 다른 시대 인물로 되살아나곤 한다. 두 번째 시리즈의 블랙 애더는 첫 번째 시리즈와도, 우리가 아는 로완 앳킨슨의 어떤 모습과도 일치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 16세기의 블랙 애더는 지적 수준이나 타인과의 권력관계가 15세기의 블랙 애더와 정반대다. 시종, 종교인, 심지어 여왕까지도 철이 없고 모자라, 지적이고 영민한 블랙 애더를 신경질적이고 냉소적인 인간으로 몰아가곤 한다. 구레나룻에 수염을 근사하게 길러 멀쩡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로완 앳킨슨은 입만 열면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는 등 웃음의 핵에서 한발 비껴나 있다. 여기서 우습고 기막힌 것은 그의 외양과 언행이 아니라 그의 기구한 운명이다.

블랙 애더가 똑똑해졌다고 해서, 세상이 그의 편으로 돌아서진 않는다. 그의 뜻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블랙 애더는 남자다움에 대한 당시의 고정관념에 부응하려다 번번이 실패하고, 남(주로 여왕)이 장난으로 던진 돌에 맞는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한다(그리고 블랙 애더는 20세기까지 1세기 터울로 이렇게 죽고 살아나기를 반복한다.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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