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널 환타지>는 테크놀로지의 신전에 바쳐진 경이로운 영화였다. 잡티까지 표현된 피부, 휘날리는 머리카락, 미묘한 표정 변화. 미리 컴퓨터그래픽이라고 귀띔받지 않았다면 실사로 착각하고도 남을 만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그래픽은 20년이 흐른 것처럼 발전했다. 실제 세계와 똑같은 풀 3D그래픽이 게임 속에서 펼쳐진다. 5년, 아니, 3년 전에는 오프닝에서나 간신히 가능했던 수준의 그래픽이 실제 플레이 화면에서 구현된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세계라도 그 완벽함은 자기 완결적인 완벽함일 뿐이다. 게임은 모니터 밖으로 나올 수 없다. 게이머는 모니터라는 창을 통해서만 게임에 개입한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은 공연에 대해 태생적인, 그리고 치명적인 열등감을 가진다. 흔히들 공연은 실제 가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공연장에 가면 무대 위만을 바라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배우들이 대사를 뱉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그리고 조명이 내리꽂힌다. 빛 속에서 배우들은 새로운 이미지를 얻고, 이는 다시 그림자란 쌍둥이로 표현된다. 현대 연극에서 무대와 객석은 절대적으로 분할되지 않는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무대 밖의 공간으로 확대된다. 오직 공연장에 가야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것으로 남아 있는 한, 게임은 공연의 힘을 따라가기 어렵다.
EA가 서비스했던 실험적 온라인 게임 <마제스틱>은 이런 한계를 넘기 위한 시도다. 예를 들어 게임을 하다보면 실제 집으로 전화가 온다. 단지 창문 너머 공간 속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게이머가 살고 있는 실재 공간 속으로 게임을 침투시키려는 야심이다. 휴대용 게임기인 게임 보이 어드밴스에서는 유독 이런 시도가 많다. 게임팩에 다양한 센서를 붙여 새로운 게임성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코로 코로 커비>에는 운동 센서가 있어서, 게임기를 직접 흔들어가며 게임을 조작한다. <우리들의 태양>에는 제목 그대로 태양빛을 감지하는 센서가 붙어 있다. 팩을 꽂은 게임기를 집 밖으로, 태양 속으로 들고 나간다. 게임 속에 태양 에너지가 저장된다. 게임 속에서 몬스터가 나오면 총을 쏴서 물리쳐야 하는데 그 총의 에너지가 바로 저장된 태양광선이다. 쓰다보면 에너지가 떨어지고 그러면 다시 채워야 한다. 게임한다고 방 안에만 처박히면 곤란하다. 틈날 때마다 밖으로 나와 에너지를 충전하지 않으면 적한테 속수무책으로 당할지 모른다. 보스전의 경우에는 태양 에너지가 충전된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직접 태양 빛을 받으며 싸워야 하기도 한다.
<우리들의 태양>이 공연에 대한 게임의 열등감을 씻어버렸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부정적이다. 게임 세계는 여전히 창문 안에 존재한다. 이 게임은 세계를 창문 밖으로 끌고 오지 못했다. 게이머는 여전히 창문 안 세계를 들여다볼 뿐이다. 하지만 대신 실재 세계가 창문 속으로 들어갔다. 바깥 세계의 도움 없이는 게임을 플레이할 수 없다. 창문 너머 실재 세계의 태양 빛이 곧 게임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다. 센서라는 장치 덕분에 게임 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가 희미해진 것이다. 출발은 미약하지만 미래는 열려 있다. 테크놀로지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기술만을 숭상하다가 게이머들에게 외면받은 게임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창문을 넘을 날개가 될 수는 있다. 아직은 힘이 부족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 경계가 깨질 것이다. 그 순간, 게임은 새로운 단계로 진화할 것이다.박상우/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