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겨울인데도 먼저 피어준 동백꽃, 자전거를 타고 오른 언덕길의 석양, 욕실 바닥에서 헤엄치는 금붕어 모양의 타일. 우리의 주인공들에게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이다. 하지만 그 장면을 함께했던 누군가가 사라진 지금, 그 하나하나는 가슴을 도려내는 단도가 되어버렸다. 토오루와 메구는 엄마를, 켄지는 갓 결혼한 부인을 잃어버렸다. 엄마이면서 부인이었던, 그들 사이를 잇는 유일한 나사였던 하츠코는 그해 유행한 인플루엔자로 어이없게 세상을 떠났다. 10살밖에 차이나지 않는 젊은 새 아버지와 알 건 다 아는 고등학생 남매, 알량한 호적을 떠나면 연결될 어떤 끈도 없는 이들이 같이 살아야 한다. 도대체 그럴 필요가 있는 걸까?
히구치 아사의 <가족, 그 이후>(학산문화사 펴냄)는 제목 그대로 한 가족이 무너져버린 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새파랗게 젊은 남자와 결혼한 엄마가 두 아이를 남겨두고 갑작스레 죽어버렸다. 남자는 법적인 아버지가 되어 남매와 살아간다. 사실 헤어진다 해도 무슨 상관이 있을까? 엄마가 남겨둔 보험금도 있고, 큰 재주는 없어도 자립심 강한 두 아이를 외가에서 고등학교를 마칠 정도만 맡아주면 될 텐데. 하지만 이들은 같이 살아간다. 남자의 의무감 때문일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울 것이다. 이 젊은 홀아비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버둥대며 이 아이들을 통해 겨우 삶을 지탱하고 있다.
인위적인 가족의 생활이 마냥 편안할 수만은 없다. 오빠인 토오루가 가장 먼저 그것을 눈치챈다. 아버지고 어쩌고 간에, 낯설디 낯선 어른 남자와 한집에서 살아간다는 일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방 안에 처박아둔 성인 잡지도 치워버려야 하고, 팬티에 담요를 걸치고 뒹굴대는 겨울날의 행복도 만끽할 수 없다. 요리에 빨래에 이미 주부가 되어버린 여동생 메구에게 괜히 심술이 나서 따진다. “메구, 너도 전에는 목욕하고선 발가벗고 나왔잖아.” “그건 특별히 켄지씨 때문에 안 하는 게 아냐.” “방귀도 아무렇지도 않게 뀌었었고….” “참고 있는 게 아니라니깐. 하고 싶을 땐 한다고.” 그러나 이러한 불편함의 밑바닥에 결국 자신들이 그 남자의 짐일 뿐이라는 생각이 무겁게 깔려 있다.
그런데 정작 아이들을 떠안은 켄지가 이 집안에서는 가장 어린애인 셈인데, 그것이 이 만화에 큰 생명력을 준다. 엄마의 죽음이 가져온 비극의 조각들이 그렇게 쉽게 가시지는 못한다. 그래서 만화가로서도 독자로서도 참으로 위태한 상황들이 이어진다. 비극과 웃음,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어지면 식상한 만화가 되어버린다. 이 만화는 울리려고 작정한 신파극도, 비비 꼬인 가족을 통해 웃음을 터뜨리려는 개그물도 아니다. 그래서 하츠코를 떠올릴 일이 생기면 어른답지 못하게 울음을 터뜨리는 켄지의 모습이나 신랄하다 못해 정다워 보이기까지 하는 오누이의 다툼이 위태한 균형을 잡아주는 추가 되어주고 있다.
만화가 히구치의 솜씨는 아직 설익었다. 인물도 단순하고 어색한 데생도 많다. 그러나 생활의 사소한 서정에 접근해 들어가는 섬세한 눈길과 그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려내는 솜씨는 담백하고 편안하다. 슬픔에 젖은 인물들이 한없이 침울해져 있는 페이지 바로 다음에 천연덕스럽게 개그 터치의 만담을 늘어놓는 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아다치 미쓰루는 <진배>에서 젊은 새 아빠와 딸의 동거를 근친상간의 냄새가 짙게 도는 로맨스로 만들어갔다. 그러나 아다치의 단순함과 세련미는 그 상황을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이끌어가는 면이 없지 않다. 오히려 <가족, 그 이후>의 서툰 느낌들이, 슬픔의 조각들이 서로 부딪쳐 둥근 행복의 보석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의 현실감을 더 잘 보여주는 듯하다. 조금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니아 언더 세븐>이 보여준 ‘너무 섬세해서 웃음이 삐져나오는’ 생활의 묘사, 거기에 슬픔의 잔잔한 액체를 부어넣은 것이 이 만화가 아닐까 여겨진다. 빨래를 말리려고 털다가 담배꽁초가 후두두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엎어져버리는 메구의 모습, 튀김 그릇을 받아들고 침을 주루룩 흘리는 토오루를 배경으로 ‘잘해주지 않고는 못 배기겠어’라고 감동의 대사를 내뱉는 동네 아줌마의 모습 등 명장면들도 적지 않다.
<가족, 그 이후>는 네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표제작과 더불어 <가야 할 곳>이라는 단편이 묶어져 한권의 책으로 나왔다. <가야 할 곳>은 무표정한 장애 소년과 그를 사랑하게 된 게이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작가의 아마추어 시절 투고작이니만큼 어설프기는 하지만, 색다른 감정의 격조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이명석/ 사탕발림 운영 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