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명의 낯익은 노배우가 사라진다는 건 우리의 추억의 감정과 회상의 시간이 그만큼 희미해지고, 상실되어간다는 걸 확인받는 슬픈 소식이다. 편지가 도착했다. 지난 6월11일 할리우드의 명배우 그레고리 펙이 향년 87살의 나이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부인 베로니크는 “그가 무척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며 마지막 이승에서의 그의 모습을 짧은 문장 안에 담아 전했다. 1916년 캘리포니아에서 출생하여, 전화번호부 한쪽에서 이름을 얻었던 소년. 그는 배우로서 평생을 살았고, 할리우드 배우로서는 드물게 단 한번의 이혼 경력이 있을 뿐이며, 자살하여 자신보다 먼저 떠난 아들과 현재 배우로 활동하는 다른 두명의 자녀를 두었고, 그리고 이제는 세상에 없다.
브로드웨이 연극배우를 거쳐 1944년 자크 투르네어 감독의 <영광의 나날>에서 러시아인 역을 맡으며 영화배우의 길을 시작했던 그레고리 펙은 배우로서 총 55편의 출연작을 남겼으며, 아카데미 후보로 총 5번 선정되었고, 1962년에는 <앵무새 죽이기>로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노년에 접어든 그레고리 펙은 1998년 TV드라마 <모비딕>(그레고리 펙은 1950년 존 휴스턴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모비딕>에 주인공 에이허브 선장으로 출연하기도 했다)을 끝으로 연기생활을 마감했다.
그는 히치콕의 스릴러영화 <망각의 여로>(1945)에서 의사로 가장한 신경증 환자 역을 맡아 단정한 외모 안에 숨겨진 불안을 표출해냈고, 킹 비더의 서부극 <백주의 결투>(1946)와 유대인 문제를 다뤄 오스카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엘리아 카잔의 <신사협정>(1947)에서 명연기를 선보였다. 그러니까 그 시절 할리우드에 로버트 미첨이 있었다면, 그 반대편에는 그레고리 펙이 있었다. 그레고리 펙은 <케이프 피어>(감독 제이 리 톰슨, 1962)에서 살인광(로버트 미첨)의 위협을 피해 가족을 지키려는 검사 역을 연기했고, <오멘>(감독 리처드 도너, 1976)에서도 부성애를 발휘하여 자식을 악령으로부터 구출해내려 애쓰는 위태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선보였다.
그는 단정했고 부드러웠다. 또는 섬세하고 자상했다. ‘신사’의 예를 들기 위해 주저없이 사람들은 그레고리 펙 같은 남자라고 말했다. 전쟁 활극 <나바론의 요새>(김독 제이 리 톰슨, 1961)에서조차 그는 원칙과 인정으로 부하들을 이끄는 능숙한 장교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이름을 간직하게 하는 영화 <로마의 휴일>(감독 윌리엄 와일러, 1953)에서 오드리 헵번의 천진난만함을 여유롭게 안아주었던 낭만적인 미국인 기자로서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나를 박애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단순히 내가 믿는 행위에 참여할 뿐이다.” 이런 말을 남겼지만, 미국영화협회(AFI)가 “할리우드 100년 최고의 영웅”으로 뽑은 <앵무새 죽이기>(감독 로버트 물리간, 1962)의 정의로운 변호사처럼 그는 스크린 바깥에서도 인도주의적 사회활동에 몸담았다. ‘이상적 개인주의의 척도’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스크린 밖에서나 안에서나 ‘신사’였던 그레고리 펙.
‘옛’ 주말 저녁, 즐거워했던 2시간을 떠올리며 그를 기리고 추억한다. <나바론의 요새>… <로마의 휴일>….글 정한석·사진 SYG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