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질문‥종교도 매트릭스?, 1편‥'더 원'이 세계를 구할것이다
종교는 때때로 위험하다. 진실한 믿음은 마음을 해방시키는 혁명이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에게 이러한 혁명은 종파에 상관없이 매우, 매우 위험한 것이다. 혁명을 두려워하는 종교적 도그마 자체가 매트릭스이고, 우리는 그 매트릭스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한다.
지난 주, 이집트 정부는 <매트릭스 2 리로디드>(이하 <리로디드>)의 상영을 전면금지했다. 금지된 이유는 폭력이나 선정성 때문이 아니라, 인류창조에 대한 전통적 종교관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과연 이것이 중동지역 특정종교 하나의 편견에만 국한된 문제일까 아니다. 이집트 문화검열국장이 밝혔듯, “이 영화가 금지된 이유는 인간의 실존과 창조같은 주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존중하고 신봉하는 3대 유일신 종교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 모두와 관련된다.”
2003년 현재의 “현실세계”에서조차 이처럼 곤란한 질문은 위험하다. 실존의 본질 자체에 대한 질문은 기존 종교체제를 전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또 왜 창조되었는지 묻는 것은 위험하다. 종교의 권위자들은 말한다. “시스템이 만들어졌고, 우리는 단지 거기 놓였을 뿐이다. 시스템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자유는 우리에게 없다. 당신은 매트릭스를 믿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실한 믿음을 위해 매트릭스에 도전해야만 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내가 여기까지 왔는가” “맹목적 신앙은 진실한 길인가 아니면 거짓인가” “이 방대한 시스템의 설계자 내지 프로그래머는 선한가, 악한가”
<리로디드>는 매우 변혁적인 영화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주해온 맹목적인 종교적 믿음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서 놓지 못하는 믿음을 뿌리부터 뒤흔든다. 내가 접한 대중문화 가운데 이만큼 멋진 통찰을 보여준 영화는 드물다. 인간 밖의 유일한 권력을 믿는 제도화된 종교들은 또다른 형태의 통제와 지배, 즉 인간의식을 지배하는 매트릭스에 불과하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종교 자체가 일종의 매트릭스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2편‥구원자 '더 원'은 없다
<매트릭스> 1편은 스스로 깨달은 니오가 인간의식을 지배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인 매트릭스에 승리하는 것으로 끝난다. 초영웅적 존재인 니오가 인류를 구원하러 옴으로써 선지자의 예언이 실현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겉으로 보면 감독들이 이런 생각을 은근히 유도하면서 관객이 모피어스처럼 맹목적으로 생각하도록 유혹한다 - 우리가 예언을 따르기만 하면 초인적인 ‘더 원’(The One)이 세계를 구원할 것이다. 이야기 끝.
그러나 <리로디드>는 이런 생각을 완전히 전복시켜 버린다. 모피어스가 절대적 신념을 가지고 떠받드는 예언자 오러클은 매트릭스의 권력에 봉사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일 뿐이다. 오러클은 매트릭스의 “어머니”이고 시스템의 완전통제를 돕는다. 니오가 모피어스에게 말하듯 “예언은 거짓이었다. ‘더 원’의 목적은 그 어떤 것도 끝내는 게 아니야. 그건 또 다른 통제 시스템에 불과했어.” 바로 이런 전복성이 이 영화의 뛰어난 면이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 용어와 상징만 보고 이 영화가 자신들의 종파적 종교관을 입증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1편에선 세계를 구원하는 ‘더 원’이 단순한 정답인 듯도 하다. 그러나 2편은 “정답” 대신 모든 위대한 종교들이 가르쳐온 일, 즉 질문을 제시한다. 사람들이 안주해온 신앙체계를 전복하고 무너뜨린 다음, 우리 실존의 본질 자체에 대한 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맹목적 신앙은 정답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니오는 오러클로부터 모피어스에게 전해진 맹목적 신앙을 이제 버려야 한다고 깨닫는다.
따라서 <리로디드>는 종교적 확실성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어떤 도그마나 예언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쉬운 신앙을 주창하는 영화도 아니다. 쉬운 정답 대신 위험하고 심오한 질문을 제시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상영금지된 것이다. 정치적이건 민족적이건 종교적이건 아무리 확실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맹목적으로 따르는 대신 질문해야 한다.
니오와 설계자의 만남 역시 많은 것을 시사한다. 니오는 두개의 문 가운데 선택해야 한다 - 한쪽으로 가면 시온을 구하지만 연인은 죽는다. 다른 한쪽으로 가면 연인을 구하지만 시온주민 모두가 멸망한다. ‘더 원’의 사명은 인류의 구원이다. 예언에 따르면 그것이 니오의 목적인 것이다. 시온을 구하지 않으면 니오는 ‘더 원’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니오는 예언으로부터 자유롭게 행동하기를 선택하고 트리니티를 구함으로써 설계자에 맞선다. 예언의 계획 대신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을 따름으로써, 궁극적인 힘은 설계자가 아닌 바로 인간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인과법칙을 넘어서고 매트릭스 시스템의 설계자와도 대결한 니오는 홀로 서있다. 인간의 도덕적 조건에 대한 책임은 오직 인간 자신에게 있을 뿐, 개인의 자유의지보다 더 큰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 니오의 말처럼 “선택, 문제는 선택이다.”
만일 신앙에 대한 전통적 지지를 철회했다면, <리로디드>에서 종교적 믿음이란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1999년 인터넷 채팅 인터뷰 중 “이 영화에서 신앙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감독 워쇼스키 형제 스스로 답한 바 있다. “(우리가 관심 있는 문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니오가 시온에 돌아왔을 때 한 청년이 “당신이 나를 구했어요”라고 외친다. 그러나 니오는 퉁명스럽게 답하기를 “아니요, 당신 자신이 스스로를 구한 겁니다.” 그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너를 구한 것은 네 믿음”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처럼 사람들은 누군가 “다른” 이가 “나를” 구해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더 원’이 필요한 이유이다. 허나 니오도 인간 밖의 수퍼맨이 구원자라고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우리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이뤄진 <리로디드> 비평 가운데 이 영화가 얼마나 많은 불교적 영향을 받았는지 언급한 것은 드물다. 1999년 인터뷰에서 시나리오를 쓴 워쇼스키 형제는 불교가 그들의 사상과 시나리오에 큰 영향을 끼쳤느냐는 질문을 받고 “예스!”라 대답했다. “불교와 수학, 특히 양자물리학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고 그 둘이 접합하는 지점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둘 다 오래 전부터 불교에 매혹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많은 관객이 이 점을 놓치는 것이 안타깝다. 우리는 무지와 미몽에 빠져 잠들어 있으며,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만 스스로 깨닫고 또 다른 사람들이 깨닫도록 도울 수 있다. 한편 니오가 오러클을 만나러가는 장면에선 종교물품 벼룩시장이 등장한다. 힌두교 신, 성모 마리아, 예수상 등이 보인 후 마지막으로 카메라는 불상을 비춘다. 화면 속의 부처는 명상자세로 앉아 자기 마음의 본질을 관조하고 있다. 니오가 오러클을 만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비춰진 종교의 이미지가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1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니오는 마치 최후의 초영웅 ‘더 원’처럼 보인다. 하지만 2편에서 밝혀지는 놀라운 사실에 따르면 니오는 “수학적 완성”의 여섯 번째 예외, 여섯 번째 구원자이다. 흔히 상징 기법을 사용하는 영화에서 과연 이 여섯 번째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불교에 매료된 감독들의 답은 명료하다 - 불교에서 2500년 전 나타난 석가모니 부처는 고해의 매트릭스인 이 우주에 나타난 여섯 번째 부처로 간주된다. 고전불경에 따르면, 새로운 우주가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부처가 나타나 미몽에 빠진 중생을 제도한다. 만물이 유전하므로 우주 또한 끊임없이 변하고 이윽고 쇠하여 적멸한다.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고 따라서 새로운 부처가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태어나고 다시 또 태어나고 - 나는 중생들 가운데 다시 태어날 것이다.”
<리로디드>가 던지는 화두는 바로 믿음이다. 이 영화를 감상하기에 따라서는 대중문화가 성서나 불경처럼 올바로 종교적 믿음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