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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쿼터냐 한-미투자협정이냐
2003-06-17

4년만에 논쟁재연‥양자택일 갈림길.“문화죽이기”-“40억달러 투자효과,”협정내용 정부서 공론화 외면논란

극장에 한국영화 의무상영 일수를 부과하는 스크린쿼터 제도를 둘러싼 논란이 4년 만에 다시 불거졌다. 이번엔 논쟁의 양상이 조금 다르다. 4년 전만 해도 스크린쿼터를 유지한 채 한미투자협정을 맺을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스크린쿼터 유지론자나 축소·폐지론자 양쪽 모두 배제하지 않았다. 지금은 둘 중 하나, 양자 택일만 남았다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재경부 장관을 비롯한 축소·폐지론자들은 “스크린쿼터 양보 없이 협정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영화계를 위시한 유지론자들은 한미투자협정 자체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겠다고 밝히고 있다. 지금은 스크린쿼터에 시선이 집중돼 있지만, 양자택일의 문제로 내몰리고 있는 만큼 논란이 치열해질수록 저울의 한쪽을 차지하는 한미투자협정이 같은 비중, 또는 그 이상으로 도마에 오를 가능성이 짙다.

‘40억달러’와 ‘문화정체성’

한미투자협정의 문제점은 오래 전부터 제기됐다. 협정이 체결되면 스크린쿼터 같은 국내산업 보호제도, 외환시장 안정을 위한 비상조처 등의 백지화가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협정을 맺을 때 오는 이득은 뭘까. 최근 권태신 재경부 차관보는 “한·미 투자협정이 체결되면 40억달러의 외국인 투자 효과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이는 재경부가 지난 4월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F)에 의뢰한 연구용역 보고서에서 나온 것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협정이 체결되면 한반도의 안보 위험이 줄어들고 이는 ‘한국은 안심하고 투자해도 좋은 나라’라는 신호가 돼 외국인투자가 32억~70억달러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이는 다른 조건이 동일한 가운데 협정 체결이 외평채 가산금리 0.2~0.3% 인하로 이어질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 일종의 시나리오일 뿐이다. 지난 98년 같은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미국과 90년대 초반에 이 협정을 맺은 13개 국가 가운데 협정 발효 뒤 3년간 외국인 투자가 늘어난 나라가 3곳에 불과하다는 조사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면 한국영화가 자국시장 점유율 40%를 넘을 만큼 성장했음에도 스크린쿼터를 고수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가 없다면 한국영화가 잠시라도 위축됐을 때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멕시코를 예로 든다. 93년 자국영화 제작편수가 53편이었던 멕시코는 94년 미국과 NAFTA(북아메리카자유무역협정)를 맺으면서 스크린쿼터가 유명무실해지자 95년부터 10~16편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이건 영화산업에 국한된 얘기다. 영화인들이 보다 강조하는 건 ‘문화정체성’이다. 문화상품은 그 문화의 정체성과 직결된 것인 만큼, 다른 상품과 달리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정체성이라는 가치를 수치로 환산하는 건 한미투자협정 체결의 이득 계산보다 더 모호하지만, 이런 주장은 국제적 역학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은 90년대 중반 캐나다와 FTA(자유무역협정)를 맺으면서 문화산업을 예외로 하는 등 몇몇 국가와의 협상에서 문화산업을 제외시켜 미국 영화업계로부터 적지 않은 반발을 샀다. 최근 진행중인 WTO의 다자간협상에선 문화상품도 예외로 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고, 유럽 국가들은 이에 맞서 예외 인정을 결의하고 나선 상태다. 한 재경부 관계자는 “미국이 5억 달러 규모밖에 되지 않는 한국 영화시장에 이처럼 집착하는 것은 한국을, 앞으로 있을 양국간·다자간 투자무역 협상에 문화상품을 포함시키는 시범케이스로 삼으려 하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하나의 쟁점, 공론화

한미투자협정이 처음 불거진 98년 당시엔 재경부까지도 세이프가드(외국환 거래의 일시정지) 문제 때문에 협정에 유보 내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방문 때 공식 제안한 탓에 재경부뿐 아니라 어느 부처도 반대의견을 공개적으로 내지 못했다. 99년초 영화인들의 격렬한 반대로 잠시 수그러들다가 그해 6월 대통령의 두번째 방미를 앞두고 이 협정이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을 때는 장관이 바뀐 재경부 등 경제부처가 가세했으나, 농림부와 문화부가 반대 내지 유보적 태도를 보였다. 연근해 어업 외국인 참여 제한(농림부)과 스크린쿼터(문화부) 등의 제도가 협정과 상충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부처간의 마찰도 밖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막상 정부가 협정 체결을 유보한 데는, 외국 기업이나 개인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뉴욕의 투자분쟁 조정기구에 제소할 수 있도록 한 BIT 조항에 법무부 검사들이 반대했음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뒤늦게 전해졌다. 세이프가드, 잎담배 수매, 투자분쟁시 재판관할권 등 모두가 국민생활과 직결된 사안임에도 이처럼 공론화한 적이 없었다. 4년이 지나 한미투자협정을 다시 추진하기까지 이런 사안들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한신대 이해영 교수는 “한미투자협정이 지닌 문제점도 심각하지만, 그보다 이 협정이 밀실에서 추진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임범, 안재승 기자 is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