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그녀들의 집으로 오세요,<장화, 홍련> 세트 [1]
김혜리 2003-06-13

그녀들의 집으로 오세요

핏빛 이야기를 머금은 공간, ‘하우스호러’ <장화, 홍련>의 세트를 방문하다

네 식구가 살 만한 한적하고 전망 좋은 집을 구하신다구요? 정말 잘 오셨습니다. 마침 딱 알맞은 기막힌 물건이 나와 있거든요. 1층만 80평쯤 되는 이층집인데 발코니도 있고 마당도 널찍한데다 온실까지 있답니다. 숲과 저수지가 지척이니까 쾌적하기 이를 데 없지요. 무엇보다 가격도 말씀하신 정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고요. 누가 압니까? 제가 주인하고 말만 잘하면 더 싸게도 가능할지. 전에 살던 사람들이요? 젊은 분이 별게 다 궁금하세요. 글쎄요… 뭐 아주아주 조용한 가족이라고 할까요? 행복이 가득한 집이었지요. 주인은 품위 넘치는 양반이었고 부인도 대단한 미인에다가 완벽한 주부였어요. 그뿐인가요. 두딸은 얼마나 해맑았는지. 지금은 뭐하시냐고요? 뭐, 식구들 모두 잘되어서 먼 나라로 가신 걸로 아는데 저도 확실히는… 그래도 계약이 성사되면 연락할 번호는 있으니 걱정마세요. 아 참, 고급스런 가구들까지 고스란히 딸려 있으니 몸만 들어오시면 됩니다. 특별한 추억이 구석구석 묻어 있으니 쓰는 기분이 남다르실 거예요. 이럴 게 아니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지금 당장 보러 가실까요?

초록빛 저수지를 가로지르는 다리라. 가는 길부터 예사롭지 않지요? 이 다리 끝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예전 집주인네 자매가 자주 나와 놀던 자그마한 선착장이 있어서 발을 담그거나 낚시를 할 수도 있습니다. 뭐가 걸리냐고요? 글쎄 엄청 무거운 월척이라도 있는지, 낚싯바늘에 피만 잔뜩 묻혀 돌아간 사람들이 많대요. 자, 다 왔습니다. 마당에 꽈리랑 치자가 참 곱지요? 게다가 신기한 건 몇년 전부터는 심은 사람도 없는데 울타리에는 장미가 기어오르고 물가에는 연꽃이 피더라고요.

이 집의 현관은 특이하게도 깊숙이 숨어 있답니다. 설계자가 부끄러움이 많았는지 현관까지 들어가는 길이 참 좁고 길고 으슥하죠? 이건 복도가 아니라 아예 골목이네요. 워낙 좋은 집이니까 들어가는 데 이 정도 수고는 감수하세요. 초입의 여닫이문에는 옛날 이발소 같은 판유리를 붙였고 집안으로 들어가는 미닫이문에는 간유리를 썼지요. 손님이 드르륵 문을 열기 전에는 누가 왔는지 알 도리가 없답니다.

그럼 1층부터 천천히 둘러볼까요. 맞은편이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1930년대인가 처음 지어진 일본식 집이라 구석구석 붙박이 가구가 들어 있는데 계단 아래도 잘 보시면 수납공간이에요. 오래 된 물건이나 흉측한 아니아니, 눈에 거슬리는 물건들을 꼭꼭 처박아두는 데 안성맞춤인 집 아닙니까? 거실이 어둡다니요. 모르시는 말씀, 평소엔 이래도 서재 옆쪽 온실 문만 열면 빛이 와락 쏟아져 들어옵니다. 비밀스런 일이라도 하던 중이라면 갑자기 온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당하는 기분이겠죠?

그리고 위를 한번 보세요. 2층을 빙 둘러싼 아기 침대 같은 난간을 테두리로 거실 천장은 2층까지 뻥 뚫려 있지요? 말하자면 2층에서 왔다갔다하는 사람을 1층에서 볼 수 있고 1층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2층에서 훤히 내려다볼 수 있다는 소리죠. 그림과 벽걸이가 특이하죠? 저기 걸려 있는 죽어가는 듯한 광야의 고목 둥치 그림은 어느 미술도 청년이 그린 자화상이라더군요. 묵직한 샹들리에와 벽난로는 말할 것도 없고 TV까지 운치가 있어요. 1980년대 가전제품이 그런 맛이 있잖아요. 기계 같기도 하고 가구 같기도 한 것이 텔레비전도 문살이 있는 미닫이를 양쪽으로 밀어야 볼 수 있고. 이 거실은 넓어서 잔치치러도 충분해요. 한데 전에 살던 분들은 조용한 생활을 즐겨서인지 통 인적이 드물었어요. 하긴 밤이면 거실 불이 늘 꺼져 있는 게 식구들끼리도 거실에는 잘 모이지 않는 눈치였지만.

그나마 부엌과 주방이 식구들이 다 같이 얼굴을 보는 곳이었다는데. 마침 4인용 식탁인가요? 아니, 구석에 의자 몇개가 더 있군요. 식기장이며 장식장이며 모두 서울 보광동 전문점에서 공수해온 값나가는 앤틱이죠. 그런데 저는 가구보다 벽지에 눈길이 가요. 윌리엄 모리스라는 유명한 영국 장인이 만든 문양을 쓴 벽지라는데, 매직아이 보듯이 가만 응시하고 있자면 꽃잎이 늪에 둥둥 떠가는 것도 같고 나뭇잎 사이로 두눈이 노려보는 것도 같고 정신이 몽롱해진답니다. 어어, 지금도 어지럽네요.

미닫이문 너머가 주방입니다. 식당과 주방 바닥은 통째로 빨강 데코타일을 깔았어요. 왜 이렇게 짙은 빨간색을 넓은 면적에 썼냐구요? 그야… 빨강이 원래 식욕을 돋우는 색이라잖아요. 뭘 흘려도 표가 안 나고. 양념이나 케첩이나 또… 자, 그만 부엌을 보시죠. 부엌 가구는 어차피 바꾸실 테죠? 3층짜리 녹색 냉장고며, 전기밥솥이며 지금은 저래도 70, 80년대 부잣집에서나 구경할 수 있던 물건이에요. 부엌이 남향이라 무척 환하죠? 부엌 바로 위쪽이 막내딸이 쓰던 방인데… 앗, 잠깐! 싱크대 밑은 절대 들여다보지 마세요! 다음 방이나 빨리 볼까요? 해지기 전에 다 둘러봐야죠.

온실 옆방은 이 집에서 제일 오래된 방입니다. 주인 서재였지요. 한데 어째 종이 냄새보다 약 냄새가 지독하죠? 직업이 약사인데다 부인께서 오래 병을 앓다 돌아갔으니까요. 예? 그러니까 아이들 생모 이야기죠. 아, 주인이 재혼을 했거든요. 부인을 돌보던 간호사와 서로 마음이 통했다나. 어쨌든 남자분이 워낙 장식 취미가 없어서 아무래도 방이 칙칙하고 케케하죠? 하지만 염려마세요. 이제부터 보실 방들은 모두 화려하고 화사하니까요. 특히 안방은 한껏 기대를 하셔도 좋아요. 보세요. 들어가는 복도부터 훨씬 천장이 높고 폭이 넓지요? 안방이 자리잡은 공간은, 새 신부 맞을 때였던가 이 집에 새로 덧붙인 동쪽 날개(wing)에 해당하거든요. 방이 멀기도 하네요. 서재나 거실이나 아이들 방으로 가려면 걸어서 한참이겠는데요. 이래서야 안방에 있으면 다른 식구들이 귀찮아서라도 안 찾아오겠네요.

어디 문을 열어보세요. 어때요? 남보랏빛 넝쿨 무늬 벽지에다 흑단처럼 검고 곡선이 날렵한 침대와 테이블이 고급 가구 브랜드의 전시장에라도 온 것 같지요? 하긴 쇼윈도라면 쇼윈도라고 할 수 있지요. 젊은 새 안주인이 전 부인의 체취를 싹 몰아내고 “이제 이 성의 여왕은 나”라고 과시하고 싶지 않았겠어요? 조각이 섬세한 저 삼면경 화장대를 보세요. 말이 부부의 방이지 이건 천상 여자의 방이에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는 여자야”라는 의식으로 100% 빚어진 ‘이브의 방’이랄까요. 다 보셨으면 이제 2층으로 올라가시죠. 네? 서재까지 이어지는 붉은 자국이요? 이런이런! 아까만 해도 괜찮았는데. 무슨 별난 성분의 염료를 흘렸는지 닦아도 닦아도 며칠만 지나면 다시 마룻장 밑에서 스멀스멀 올라와서 골치네요. 에이, 욕심도 많으시지. 아무리 이런 집이 사소한 흠도 없이 이런 가격에 나왔다고 생각한 건 아니시겠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자녀가 있는 가족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집은 좀처럼 구하기 힘들 겁니다. 요즘 아이들이란 이제 좀 자랐나보다 싶기가 무섭게 제 방, 제 공간 타령을 하잖아요? 외국영화만 봐도 부모들하고 같은 지붕을 이고 사는 게 지겹다고 뜰에다 텐트를 치고 정원의 나무 위에 판잣집을 지어놓고 나름대로 또래 친구들하고 살림을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집은 그럴 필요도 없어요. 2층에 아이들 방은 물론 거실도 있고 둘이서 물장난치며 종일 놀아도 넉넉한 큰 욕실에 독립된 발코니까지 딸려 있으니까 독채나 다름없죠. 물론 굶어죽지 않으려면 밥 때문에 1층에 내려오긴 해야겠지만. 하하, 농담입니다. 이리로 와보세요. 여기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끝이 은근히 명당이랍니다. 여기 몸을 접고 앉아 있으면 1층에서는 안 보이고 1층 소리는 다 들을 수 있거든요.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