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체제작의 전초전?
<전도연의 섹스 다이어리> <전지현 따라잡기>…. 이미 알려진 대로 이들은 국내 최대 매니지먼트 업체 중 하나인 싸이더스HQ가 시놉시스 공모를 통해 선발한 프로젝트들이다. 총 5천만원을 내걸고 소속 배우들에 걸맞은 영화 아이디어를 모은다는 이유로 화제를 모았던 이번 공모에는 무려 3천여편의 시놉시스가 접수됐다. 이중 박성경씨의 <전도연의…>가 대상을 받는 등 44편이 최우수상, 우수상, 장려상을 나눠 수상했다. <전도연의…> 등 몇편이 싸이더스HQ에서 개발 중이며, <전지현 따라잡기>는 튜브픽처스가 맡아 시나리오를 만들고 있다.
<그녀의 섹스 다이어리>로 제목이 바뀔 <전도연의…>는 전도연이라는 여성이 남자에게 버림받은 뒤, 일기장을 들춰 과거 남자들인 김승우, 박신양, 정우성을 추억한 뒤 그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는 이야기. 각 배우들의 특성이 강하게 반영될 뿐 아니라 캐릭터들이 생동감 있어 대사만 집어넣으면 바로 시나리오화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경의씨의 <전지현 따라잡기>는 남성들의 아이콘인 전지현을 따라잡으려는 여성들을 통해 진정한 사랑에 관해 되묻는 작품이다. 수상작은 아니지만, <미래소년 정우성>은 미래에 사는 정우성이 일이 안 풀려 과거로 돌아온다는 이야기. 아버지인 장혁과 어머니를 만나 벌어지는 황당무계한 사건을 그린다. <탁구소년 임창정>은 탁구 외엔 완벽한 인간인 임창정이 유전자 복제를 통해 탁구왕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 임창정은 싸이더스HQ 소속이 아닌데도, ‘이범수씨도 좋습니다’라는 단서를 달고 응모된 작품이라고 한다.
싸이더스HQ가 꽤 많은 예산과 시간을 들여 이 공모전을 개최한 이유는 우선 모니터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김승우, 김혜수, 박신양, 신민아, 이범수, 이은주, 장혁, 전도연, 전지현, 정우성, 정진영, 조인성, 차태현 등 소속 배우들이 일반인에게 어떤 이미지로 비치는지를 알 수 있다는 얘기다. 정훈탁 싸이더스HQ 대표는 “관객이 우리 배우에게 원하는 캐릭터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자료인 셈”이라고 말한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야말로 배우에게 걸맞은 시놉시스를 찾아내 영화화하기 위한 것. 정 대표는 상당수 작품이 요즘 트렌드에 걸맞으면서도 배우들에게 잘 어울려 대만족을 표한다. 행사를 정례화하려는 것도 성과가 기대 이상이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의도도 있다. 이는 결국 싸이더스HQ의 자체 영화제작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 그동안 충무로는 공동제작을 꾸준히 추진해온 싸이더스HQ가 언제쯤 직접 제작에 뛰어들지 촉각을 기울여왔다. 공모전은 그 신호탄인 셈이다. 매니지먼트로 출발하다보니 부족할 수밖에 없는 창작 역량을 공모를 통해 보완한다는 것이다. 싸이더스HQ는 이미 1년 전부터 충무로 PD 3∼4명을 확보해 자체 역량을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정훈탁 대표는 “1년에 2∼3편 정도를 자체 제작할 것”이라고 밝히면서도, 싸이더스HQ가 대형 제작사가 될 수는 없을 거라 말한다. 어차피 충무로가 활성화돼야 배우 또한 살아남는 탓에 다양한 제작사와 협력관계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 그는 이번 공모 결과를 원하는 제작사들에 공개하고, 함께할 수 있는 부분은 적극 협력할 계획이다. “어려운 제작사가 많은데, 배우와 시놉시스가 함께 있으면 투자도 유리하지 않겠냐”는 설명이다. 확실한 것은 이 과정을 통해 싸이더스HQ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리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충무로 내 파워 강화가 싸이더스HQ의 궁극적인 목표일까. 정훈탁 대표에 따르면 이들의 야심은 훨씬 크다. “결국 우리의 브랜드를 아시아의 대표로 키워내는 거다.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권 배우를 쓰려면 우리를 찾아올 정도가 돼야 한다. 물론 그것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배우와 매니지먼트가 제작에 본격 참여하는 것이 한국 영화산업과 작품 수준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쉽게 감잡을 순 없지만, “배우는 제작자보다는 관객쪽에 더 가까울 수밖에 없다”는 매니지먼트업계의 공통 의견을 고려하면, 제작패턴이 좀더 트렌드에 민감한 방향으로 향할 것은 예상 가능하다. 그것을 관객추수라 부르건 대중성 강화라 일컫건 말이다. 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