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사람 만나는 횟수는 늘지만 각각의 만남에 투자하는 시간은 점점 짧아진다. 그나마 직접 만나는 경우보다 전화나 메일로 접촉하는 기회가 더 많다. 이런 환경에서는 짧은 시간에 사람을 판단하기 위해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상대를 관찰하는 동물의 습성이 나오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보여질 때는 시선의 입맛에 맞게 연기한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는 연기가 있고, 나는 그 너머가 늘 보고 싶다.
매개의 시대, 미디어의 시대, 이미지의 시대, 배우 시대. 이런 말들이 나는 자꾸만 ‘뺑끼의 시대’로 들린다. 관중의 요구에 맞게 유연한 연기를 보여주는 것이 세련된 현대적 라이프 스타일로 인정되기보다는 천박한 화장술 내지는 사기술로 보인다. 그런데 나는 종종 내 안에서도 그런 연기를 느낀다. 그래서 누군가가 한 말 “사는 게 레토릭이여” 이런 말로 물타기를 하며 이 문제를 회피한다. 당대의 형식을 부정한다는 것은 아나키의 고독을 의미한다. 나는 그 지경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강유원의 서평집 <책>을 읽으면서 이런 느낌이 들었다. “아! 이 사람은 참을 수 없는 게 참 많구나.” 그는 대중매체에 캐스팅되면서 자칭 혁명가라고 말하는 입을 못 참고, 학문을 하면서 사소한 잿밥으로 자존심을 구기는 학자를 못 견디고, 가정부를 두고 여성운동을 하는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를 못 봐준다. 또, 자본주의를 논하면서도 합리성 개념의 기초도 정립하지 않고 글을 쓰는 사회평론가를 우습게 알며, 하와이에 오두막을 얻어서 에고와의 전쟁을 벌인 무용가의 정신을 미학적 사치로 뭉개버린다. 그의 시비는 사방으로 뻗어 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은 결국은 한 가지 불만으로 귀착된다. 그는 체질적으로 ‘뺑끼’를 못 참는다.
‘뺑끼’는 행위의 양태나 결과에 적용되는 말이 아니라 태도나 자세와 결부돼 있다. 글로 얘기하면 내용 이전에 문체 자체의 문제이다. 그러니 그의 시비가 사방팔방을 튀는 것은 그의 눈에 한국사회에 유통되는 화법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형식에 스민 문제를 비판하는 것은 대단히 피곤한 일이다. 자칫하면 형식을 파괴하려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고, 정치적 제휴의 여지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글쓰기는 언제나 아니키의 고독을 감수해야 한다. 내가 아는 한 그런 인간은 극소수다. 그런 사람의 사유와 문체는 희소성을 갖는다. 그의 문체는 기본적으로 무겁다. 유머를 할 때도 심각하다. 그는 발랄함, 유연함, 능란함의 뺑끼에 저항하며 글을 꾸역꾸역 밀고 나간다. 그 힘으로 사람을 끌어들인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내 안의 뺑끼를 사포로 긁어내는 듯한 까칠한 쾌감을 느꼈다.
이 책의 표지에는 13호 안팎의 작은 활자로 <책>이라는 제목이 찍혀 있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강유원 지음’이라는 저자 표기가 있다. 그 외에는 아무런 글자도 없다. 책이 주인을 많이 닮았다. 표지를 넘기면 같은 크기의 활자로 81권의 책 제목이 목차를 메운다. 나는 칼 뢰비트의 <베버와 마르크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 리오 휴버만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등이 읽고 싶어졌다. 기자 지망생 등 글쓰기를 업으로 하고자 하는 20대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자의식이란 게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남재일/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