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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도깨비들이 춤춘다,말리의 <도깨비 신부>

참 오랜만에 만난 힘이 넘치는 신인이다. 스스로 ‘늦깎이 데뷔’라고 밝히기도 했지만, <도깨비 신부>는 신인의 데뷔작치고는 꽤 숙성된 작품이다. 또한 상투적인 동어반복의 만화들이 넘치는 요즘 데뷔작의 미덕을 온전히 간직한 보기 드문 작품이기도 하다. 원숙함과 신선함이라는 낯선 두개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는 <도깨비 신부>는 자칫 이국의 옷을 입은 퇴마사(클램프의 <신춘향전>을 보라!)로 전락해버리기 십상인 세습무의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매력적’이라 했지만 할머니, 어머니에 이어 손녀가 신내림의 기운을 받아 낯선 것들을 본다는 설정이나 영을 보는 능력을 터부시하는 상황은 무척 익숙하다. 무녀인 할머니, 무녀의 길을 거부해 잡귀잡령의 지배를 받아 일찍 죽고 만 어머니, 할머니만큼 신기가 강한 손녀, 그리고 딸과 상관없이 도시에서 재혼한 채 살고 있는 아버지라는 인물구도는 어떤 갈등구도로 이야기가 펼쳐질 것인가를 짐작게 해준다. 하지만 이런 낯익은 갈등구도는 마을신과 함께 생명력이 꺼져가는 작은 어촌마을 모습이나 TV 앞에서 재현되는 용신굿 모습 등 실감나는 풍광에 안착되며 판타지나 퇴마물이 아닌 독특한 자신의 만화로 거듭난다. 신기가 있어 신을 보는 아이가 일본의 풍경 속에, 일본의 귀신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풍경에 우리의 귀신들과 함께 있다는 말이다. 일본의 것이나 중세유럽이 아닌 우리의 현실에서 출발한 만화는 독자와 새로운 공감대를 만든다.

<도깨비 신부>는 순정만화를 통해 익숙해진 시각이미지의 관습 대신 한국적 이미지를 구현한다. 도깨비의 모습은 일본식 ‘오니’도, 기거의 ‘에일리언’도, 일본 성인만화의 ‘촉수’도 아닌 신라시대의 기와나 문고리에 그려진, 효종 영릉을 지키고 있는 바로 그 도깨비의 모습이다. 한국 만화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이름과 모습이 일치하는 도깨비였다. 용신이나 마을장군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용의 모습 그대로, 장군의 모습 그대로 칸에 등장한다. 더 대단한 것은 작은 어촌 마을 아저씨들의 모습이다. 언덕 위 나무에 앉아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외지에서 온 용신굿패를 바라보는 장씨 할아버지의 모습은 부인할 수 없는 시골 할아버지의 모습 그대로다. 늙은 무녀인 할머니의 얼굴도 신과 함께 살아온 푸근함과 마을 사람들의 안위를 생각하는 넉넉한 성품이 느껴진다.

용신과 만나면서 젊은 옥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장면은 어떤가. 4칸을 거슬러 늙고 넉넉한 무녀에서 젊고 아름다운 무녀로 변한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오랜 관찰과 연습을 통해 축적된, 그래서 현실의 친숙한 모습들이 담긴 <도깨비 신부>의 시각이미지는 만화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잘 설명한다.

이야기 전개도 마찬가지다. 무서운 귀신이나 도깨비, 마물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함께하는 인간적인 신의 모습을 그린다. 오랜 시간 마을신을 모시고, 용신을 불러내 굿을 하던 옥분이 늙어가는 모양을 옆에서 오랜 친구처럼 바라보는 마을신의 모습이나 하늘가는 길에 꼭 배웅하겠다던 약속을 지킨 용신의 모습은 절대적 권위의 신이라기보다는 오래 두고 사귄 벗처럼 보인다.

만화는 시각이미지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다. 만화의 힘은 시각이미지 언어의 힘에서 나오고, 이야기의 힘에서 나온다. 만화의 그림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언어다. 언어의 힘은 소통에서 나온다. 만화의 그림이 눈에 보이는 실물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 과장, 제거를 통해 나오며, 만화의 연출이 전개되는 장면을 모두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필요한 부분만 칸으로 나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도깨비 신부>는 기존의 관습적인 순정만화의 이미지 대신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고, 그 언어는 만화에 등장하는 신들, 늙어버린 할머니 무녀와 작은 시골의 할아버지들을 창조한다. 그리고 초등학교 1학년 때 자신에 대한 타인의 혐오를 느껴버린 주인공 선비를 보여준다. 상투적인 방식이 아닌 우리 삶의 어느 맥락에선가 만났음직한 그들은 예쁘고, 규격화된 다른 만화에서 느낄 수 없는 시각이미지의 힘이다. 2002년 10월에 1권이 나왔고, 2003년 5월에 2권이 나왔다. 1권의 흥미로운 도입은 2권으로 이어진다. 감정의 과잉이 이후로도 절제되어지고, 작가의 끈기가 칸 안에 펼쳐질 때, 작가 ‘말리’는 더 큰 성과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고전문학을 전공한 선생님과 식사를 하면서 왜 우리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작가들은 우리나라 고전이라는 보물창고를 열지 않나 하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도깨비 신부>를 통해 만화와 만난 풍부한 고전세계의 한 자락을 본다. 이건 가슴 두근거리는 가능성이다.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