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의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더니 한쌍의 남녀가 허겁지겁 끌어안은 채 서로 옷을 벗기며 소파 위로 직행한다. 몸이 달아올라 마구 달려드는 남자와 까르르 웃어대는 여자, 하지만 행복한 오후의 정사라고 하기엔 뭔가 께름칙한 구석이 있다. <샌드위치> <VS> 등의 단편을 만든 유선동 감독의 디지털 장편영화 <테스트>의 세계는 이런 불온성에 기반하고 있다. 주인공 동식은 임신했다는 애인에게 “결혼하자”고 말하면서도 속으론 괴로워한다.
그는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애인의 여자친구와 관계를 맺는다. 동식의 애인 영주는 임신하지 않았지만, 거짓말로 동식의 반응을 떠본다. 동식의 청혼에 감동하는 그녀는 발길을 동식의 선배집으로 돌려 섹스를 한다. 그런데도 동식과 영주는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한 듯 웃음짓는다. <테스트>의 인물들은 서로를 시험에 들게 하는 거짓말을 거듭하며 앙상하게 뒤틀린 관계를 드러낸다. 제목 ‘테스트’는 영화에서 임신 테스트, 진실 테스트 등 중의적인 얼굴로 드러난다.
5월 말 서울 강남역 인근의 한 호텔형 주거시설에서 이뤄진 영주와 선배의 정사장면 촬영은 꽤 야했다. 아니, 야했다고 한다. 배우들이 긴장한 탓에 리허설을 끝낸 뒤 정식 촬영 때는 꼭 필요한 스탭만 응접실 소파 주변에 남고, 나머지 인원은 방 안으로 격리됐기 때문이다. 배우들이 내는 소리가 리허설 때와 달리 실감났던 탓에 방 안에 ‘갇혀’ 응접실 상황을 상상만 하는 것은 꽤 감질나는 일이었다. 리허설 때 베드신을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던 유선동 감독은 갑자기 “좋아?”라는 말을 던져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그는 이어 배우들에게 “정말 좋아하는 듯한 감정을 보여달라”는 주문을 했다.
<뽀삐>와 의 이진숙 프로듀서가 주도해 제작 중인 이 영화는 4천만원의 예산을 갖고도 스탭에게 인건비를 나눠주는 합리적인 시스템을 자랑하고 있다. 각종 기관과 단체, 학교 등에서 좋은 장비를 값싸게 대여했고, 입봉 직전의 스탭을 기용해 기술적으로도 상당한 완성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게 이 PD의 말이다. 동식 역의 이상혁과 선배 역의 김태범은 연극배우이고, 영주 역의 김주령은 <청춘>과 <살인의 추억>에 출연했으며 연극무대에서도 활동 중이다. 영주의 친구 정화 역의 김영애는 난생처음 연기를 펼쳤다. <테스트>는 6월 중순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을 거쳐 겨울쯤 배급될 예정이다. 영진위 배급지원이 꼭 필요하다는 게 이진숙 PD의 이야기다. 사진 조석환·글 문석
♣ 동식은 영주의 임신문제를 상담하기 위해 선배를 찾는다. 선배가 영주와 깊은 관계란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채 그는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는다. (사진 왼쪽)♣ 영주와 선배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황급히 키스를 나누고 서로의 옷을 벗긴다. 유선동 감독은 “1년 만에 본 연인처럼 미칠 듯이 ‘하고 싶은’ 감정을 표현해달라”고 주문했다.(사진 오른쪽)
♣ 촬영이 진행된, 하룻밤에 25만원이나 하는 호텔형 주거시설. 다행히도 판촉 차원에서 5만원에 대여할 수 있었다.(사진왼쪽)♣ 미국 실험영화제인 블랙마리아영화제에서 디렉터스 초이스 어워드를 수상했던 <VS>나 <샌드위치>를 통해 재능을 인정받았던 유선동 감독은 첫 장편영화를 통해 진정한 소통이 불가능한 현대의 남녀관계를 ‘테스트’라는 키워드로 풀어 보여준다. (사진 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