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베터 댄 섹스>를 보고 성과 사랑의 관계를 다시보다
한 미국인 영어 강사가 한국인의 성에 관해 한 말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한국인은 성에 대한 대화가 거의 없어서 관심 자체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미국인보다 더 성에 집착하는 것 같다. 미국인이 성에 대해 수다를 떨고 있는 사이 한국인은 뒤에서 묵묵히 실천하고 있더라.”
얼마 전 모 일간지에 실린 한국인의 성에 관한 기사의 일부분이다. “한국인의 89%(남성 96%, 여성 82%)가 섹스가 생활에서 중요하다고 응답해 세계 평균 73%(남성 83%, 여성 71.2%)보다 월등히 높았다. … 그러나 성에 대한 높은 관심과는 달리 실제 성관계 횟수는 세계 평균을 밑돌았다.” 이 통계만 보면 한국인은 성에 관한 실천도 부실하다. 과연 그럴까?
이 조사는 부부관계만 다루지 매춘은 무시한다. 한국의 매춘시장 규모를 보면 부부 사이의 부실한 실천은 매춘시장에서의 묵묵한 실천의 결과라는 가설이 가능하다. 성행위의 동기에 대해 한국인의 대다수가 “배우자를 위하여”로 답했다. 섹스를 봉사로 여긴다는 것은 일종의 강박이고, 그런 강박이 침실의 행복을 보증해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고단한 ‘의무방어전’에 대한 마초적 자긍심이 매춘시장에서의 남성의 권리장전을 만들어낼 공산이 크다. 이렇게 하여 생긴 도그마가 ‘사랑(혹은 가정) 따로 섹스 따로’이다. 이 따로국밥은 남성 전용이다. 여성은 여전히 사랑과 섹스를 순대처럼 하나로 상상한다.
근대의 핵가족을 지탱하고 있는 ‘낭만적 사랑’의 이데올로기가 성과 가족을 연결하는 방식은 ‘사랑하면 결혼하고, 결혼한 뒤 섹스하라’이다. 이 교리는 사랑하면 섹스는 문제가 아니라고 전제한다. 그래서인지 ‘낭만적 사랑’의 교의를 전하는 로맨틱코미디는 우여곡절 끝에 남녀가 사랑을 이루는 곳까지만 보여준다. 그 다음에도 계속 전개되는 결혼생활의 일상은 생략된다. 결혼 10년 뒤 전형적 일상은 어떤 것인가? 혹시 애초에 판타지였던 사랑은 거품처럼 꺼지고 화음을 내기 어려운 까다로운 두몸만이 덩그렇게 남는 건 아닌가?
나는 이 지점에서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과 섹스를 하나로 상상했던 사람은 그 사이의 단절을 느끼면서 내게 사랑은 없다고 절망할지 모른다. 여전히 로맨틱코미디를 보면서 ‘사랑하면’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도깨비 방망이에 집착하면서. 그는 사회를 조직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진실로 받아들이면서 사랑을 과신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반대로 사랑과 섹스는 별개라고 호언장담했던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랑을 잃고 섹스에 탐닉하지 않을까. 여전히 사랑을 잘 관리한다고 착각하면서. 그는 사랑과 섹스는 무관하다고 자신의 권력을 맹신한 사람이 아닐까? 전자가 우둔하다면 후자는 거만한 게 아닐까?
<베터 댄 섹스>는 사랑과 섹스에 대한 제3의 태도가 엿보인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사랑하면 섹스하라는 로맨틱코미디의 교리를 살짝 뒤집는다. 두 남녀는 처음 만난 날 성적 매력에 끌려 밤을 함께 보낸다. 그렇게 시작해서 사흘 밤낮을 섹스만 하는데, 그 과정에서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여기서 가정하는 섹스와 사랑의 관계가 재미있다. 그들은 섹스할 때 사랑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랑에서 섹스를 배제하지도 않는다. 섹스의 지위는 독립적인 행위이고, 사랑의 관계 속에서는 사랑의 부분이다. 그러니까 사랑없이 섹스를 하는 것은 무해하며, 사랑할 때 섹스를 하는 것은 유익하다. 나는 이 관점이 마음에 든다. 그 이유는 이렇다. ‘사랑하면 섹스하라’는 교리는 ‘사랑하면’에 방점을 찍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섹스하라’는 술어에 무게중심이 실려 있다. ‘사랑하면’이라는 말은 섹스의 교환에 어떤 제도적 요건이 필요함을 암시하는 은유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말은 섹스를 억압하면서 섹스를 환기시켜서 결국은 섹스로 욕망을 추동할 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면 섹스하라는 교리는 사랑을 섹스로 환원하도록 만든다. 로맨틱코미디가 사랑의 결정적 순간에 섹스를 배치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베터 댄 섹스>는 이 문법을 역류한다. 섹스로 사랑이 시작되지만, 사랑이 섹스에 고착돼 있지는 않다. 섹스와 사랑의 연결고리를 끊음으로써 섹스를 지표로 사랑의 성패를 판단하는 성도착을 없앤다. 사실 사랑과 섹스를 하나로 생각하면 오히려 섹스 자체는 더러운 것으로 느끼기 쉽다. 성은 밥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아름답거나 더럽지 않다. 음란함은 성을 더럽게 생각하면서 탐하는 자의 태도 속에 있다. 사랑하면 섹스하라는 교리가 이런 태도를 부인하기 위한 강박의 산물이다. 처음 만나 섹스하는 몸보다 더 음란한 것은 엉큼하게 성을 보는 눈, 그리고 그걸 아름답다고 거짓말하는 입이다. 섹스도 밥 먹는 것처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것일까?남재일/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