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평단에서 좋아해? 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군”
클린트 이스트우드부터 구로사와 기요시까지, 칸을 달군 감독 12人 어록
영화보다는 사람이 남은 영화제. 칸을 다녀간 스타감독들이 그들의 작품에 대해, 영화제에 대해, 연출관과 세계관에 대해 솔직하고 대담하게 발언했다. 취재수첩을 뒤져 찾아낸 그들의 주옥같은 말, 말, 말들.
클린트 이스트우드 (워너브러더스를 제작 파트너로 만나게 된 경위에 대해) 수많은 스튜디오가 이 프로젝트를 거절했다. 심지어 내가 잘 아는 스튜디오 관계자들로부터도 거절을 당했다. “우린 이거랑은 좀 다른 타입의 영화를 찾고 있네. 그리고 타이츠(긴축 재정을 의미하는 듯)는 자네하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 이건 요즘 기준으로는 저렴한 영화다. <미스틱 리버 리로디드>가 아니지 않은가. 결국 이 영화는 독립적인 방식으로 제작됐다. 워너브러더스와 빌리지 로드쇼에서 부분 투자를 했는데, 이렇게 해외영화제에 온 것이 그들에게 얼마간 기쁨과 보람이 됐으면 좋겠다. 투자 결정 당시, 확신하건대, 그들은 불안하고 미심쩍어했으니까.
알렉산더 소쿠로프 (영화의 도입부가 근친상간 동성애를 연상시킨다는 지적에) (격앙된 어조로) 그 얘길 벌써 여러 번 들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하고 싶어하는 걸 보면서, 유럽사회도 이제 막다른 골목에 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반응은 적어도 러시아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가능한 한 따뜻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직하고 싶다. 장성한 아들도, 그 아버지에겐 아이일 뿐이다. 우린 인간관계의 고귀한 애정을 지켜나가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세상의 휴머니티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밝은 미래>의 제목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견해에) 주인공이 제목처럼 ‘밝은 미래’로 나아갔는지 여부를 명확히 보여주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건 주인공이나 관객이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나는 자포자기한 청춘들, 그 상실의 시절을 보여주려던 것이 아니다. 물론 기성세대들은 젊은이들을 가망없고 한심한 존재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긴 하다. 사회는 시스템이다. 요즘 일본의 젊은이들이 사회의 경계와 제약을 넘어서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그런 노력이 결국엔 그들을 패배자나 낙오자로 몰고가곤 한다. 하지만 그런 한계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것이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수아 오종 (닫힌 공간을 선호하냐는 질문에) 맞는 얘기다. 나는 닫힌 공간을 무대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걸 좋아한다. 제한된 공간에서 배우들과 일할 때마다 마치 실험실에서 동물들을 관찰하는 과학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스위밍 풀>이 조금 다른 것은 영화 초반에 이야기의 무대, 그 전경을 보여준 뒤에, 이후엔 관객으로 하여금 캐릭터에 좀더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피터 그리너웨이 (<툴스 루퍼 수트케이스> 3부작의 기획 의도에 대해) 영화는 인터넷과 TV, 비디오와 달리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수용하지 않는다. 컴퓨터와 함께 자란 요즘 젊은 세대들은 새로운 이미지를 원하는데도, 영화는 여전히 19세기 소설 스타일의 내러티브만을 반복하고 있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참담할 정도로 진부하고 식상하다. 생각이 있는 감독이라면, 새로운 이미지에 대한 관객의 수용 욕구에 부응해야 한다. 관객을 매혹할 수 있어야 하며 지적이고 감성적이고 시각적인 쾌락을 선사해야 한다. 그것을 감독으로서 나의 소명으로 생각한다 (…) 오늘날 영화제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파시스트 커뮤니티가 만들어놓은 이 영화제들은 대체 누구에게 봉사하는가? 10년쯤 뒤엔 칸영화제의 존재 이유가 모두 사라져버릴지 모른다. 영화계엔 지금 거대한 변화가 일고 있다.
빈센트 갈로 (<브라운 버니>의 공식 시사 뒤에) 사람들이 내 영화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런 거다. 내 영화는 재난이고, 시간낭비인 것이다. 나는 잘난 체하고, 자기 도취적이고, 쓸모없고, 재미없는 영화를 만들려던 건 아니다.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들을 남들과 나누고 싶었지만, 그들과 코드가 맞지 않았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게 실망스럽다. 내 영화로 시간낭비했다고 느낀 관객, 그리고 내 영화에 돈을 댄 투자자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난 관객이 원하는 게 뭔지,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프랑스 평단에서 내 영화를 좋아했다고? 그 말은, 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미카엘 하네케 (영화가 9·11을 연상시킨다는 지적에) 결과적으로 9·11이 이 영화를 좀더 센세이셔널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 사건에서 영감을 얻고 소재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무려 십년 전부터 구상한 작품이었으니까.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질문을 던지려 했다. 나 자신이 나서서 설명하고 주석을 다는 것은 역효과를 가져올 뿐이다. 영화를 통해 관객을 가르치고 싶은 맘은 없다. 단 내 영화에서 오늘날의 세계에 대한 메타포를 이끌어내겠다면, 굳이 말리고 싶은 생각도 없다.
헥토르 바벤코 (<카란디루>의 브라질 흥행에 대해) 안타깝게도 브라질에선 극장 입장료로 지불할 5달러가 있는 사람만이 영화를 볼 수 있다. 입장료가 내리거나 수입이 올라야, 더 많은 이들이 극장에 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한 브라질 사람들의 관심은 놀라웠다. 값비싼 티켓을 구하기 위해 길게 줄지어선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은 기껏해야 일년에 영화 한편 볼 여유밖에 없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자국의 영화, 자신들의 이야기를 보고 싶었던 거다. 인구는 폭발하고, 교육과 의료제도는 부실하고, 정부는 속수무책이다. 나는 ‘카란디루’라는 감옥을 통해 오늘날의 브라질사회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비좁고 혼란스럽고, 엄격한 통제만이 있는 감옥 안의 삶이 오히려 감옥 밖의 삶보다 양질이라는, 그런 현실을 얘기하고 싶었다.
빔 벤더스 (<인간의 영혼>에서 다룬 세 블루스 뮤지션에 대해) 나는 블루스 음악, 그 자체를 얘기하고 싶진 않았다. 나를 매혹시킨 것은 대중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가난하게 죽어간 블루스의 영웅들, 블라인드 윌리 존슨, 스킵 제임스, J. B. 르누아의 삶과 음악이었다. 그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서, 일정 부분 재현드라마로 대체하게 된 것이다. 그 장면들은 결과적으로 상당히 리얼하게 나왔다. 비록 내가 망신을 자초한 부분도 있긴 하지만(재현 파트에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카메오 등장하는 감독 본인을 가리킴).
사미라 마흐말바프 (<오후 5시>의 정치적인 맥락을 묻는 질문에) 아버지(모흐센 마흐말바프)가 <칸다하르>를 찍을 당시, 사람들은 왜 하필 그렇게 하찮은 나라(아프가니스탄)를 다루려 하냐고 의아해했다. 아버지가 ‘잊혀진 땅’을 이야기하려 했다면, 나는 탈레반 이후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알려진 상당한 오보와 오해를 바로잡고자 했다. 미국은 아프카니스탄을 해방시켰다고 자부하지만, 현실은 그들이 TV에서 보여주는 것과 매우 다르다. 나는 아프간의 여성, 그리고 남성이 처한 상황, 그 어둡고 무거운 그림자를 가감없이 보여주고 싶었다.
드니 아르캉 (각본상을 수상한 뒤, 결과에 실망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관객에게 환대받을 수 있었다는 것, 그게 내겐 더 중요하다. 영화제가 코미디를 홀대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찰리 채플린도 생전에 상복이 별로 없었던 걸로 안다. 심사위원들은 언제나 슬프거나 심각한 영화, 심지어 폭력적인 영화의 손을 들어준다. <몬트리올 예수> 때도 황금종려상 수상이 유력하다는 여론이 있었으나,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올해도 그때처럼 심사위원상이나 받으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각본상은 좀 의외다.
베르트랑 블리에 (시사 반응이 좋지 않은 데 대해) 영화에 대한 반응이 격렬했다는 것은, 관객이 그만큼 이 영화를 좋아하거나 또 혐오했다는 뜻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반응은 밋밋하고 잠잠한 것이다. 무관심, 무반응이다. 내 전작들에 비춰봤을 때 이 영화에 대한 관객 반응은 오히려 조용한 쪽이었다. 내가 당황한 건 그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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